레인보우 바디 신드롬
진주 (JjinJhoo)
사정 로그 #0
D+183
새벽 3시, 사고 접수 콜이 울렸다.
두 번째 진동이 끝나기 전에 받았다. 18년을 하면 몸이 먼저 안다. 이 시간의 콜은 둘 중 하나다. 누가 죽었거나, 누가 죽은 척을 했거나.
"신 사정사님, 청평입니다. 차량 추락, 운전자 사망." 야간 담당이 숫자를 말하기 전에 숨을 한 번 골랐다. "사망보험금 8억입니다."
8억. 나는 커피를 포기했다. 8억짜리 현장은 커피가 식기 전에 끝난 적이 없다.
현장까지 1시간 10분. 저수지 옆 2차선 도로, 가드레일이 이빨 빠진 것처럼 한 칸 뜯겨 있었고, 견인차의 주황색 경광등이 물안개를 휘젓고 있었다. 차는 이미 뭍에 올라와 있었다. 7년 된 SUV. 운전석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배우자는 담요를 두르고 구급차 옆에 서 있었다. 남편이 새벽 낚시를 자주 다녔다고 했다. 어제도 세 시쯤 나갔다고 했다. 길이 어두워서 늘 걱정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진술은 매끄러웠다.
너무 매끄러웠다. 슬픔은 원래 문장이 안 된다. 진짜 유족의 진술은 시제가 엉키고 같은 말이 세 번 나온다. 그녀의 진술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다 있었다.
나는 트렁크를 열어달라고 했다. 낚시를 갔다는 차에 낚시 도구가 없었다. 대신 세차 영수증이 있었다. 그저께 날짜였다. 새벽마다 흙길을 달려 저수지에 다니는 사람이, 사고 이틀 전에 실내 크리닝을 포함한 풀코스 세차를 한다.
본사 전산을 열었다. 계약 이력. 석 달 전, 사망보험금이 2억에서 8억으로 증액돼 있었다. 청약서의 자필 서명 기울기가 본인 서명과 11도쯤 달랐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났다. 7시 40분, 나는 '지급 보류, 정밀 조사 의뢰' 의견서를 올렸다. 경위는 경찰이 밝힐 것이다. 내 일은 결론이 아니라 분류다. 이 건은 분류됐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데이터는 하지 않는다. 이 문장으로 나는 18년을 먹고살았다.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20분이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남자는 철야를 한 얼굴이었는데, 사실 그 얼굴은 철야와 무관하게 6개월째 같은 얼굴이었다.
현관에 우편물이 한 장 와 있었다. 발신: 서부경찰서. 나는 봉투를 뜯기 전에 내용을 알았다. 행정 문서는 두께로 결론을 말한다. 얇은 봉투는 종결이다.
'수사 중지(소재 불명) 통보서.' 대상자: 김이량. 위 대상자에 대한 소재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발견에 이르지 못하여. 관련 법령에 의거하여. 통보합니다.
세 문장이었다. 183일이 세 문장이 됐다.
나는 통보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식탁에는 자리가 두 개다. 한쪽 의자는 183일째 같은 각도로 비어 있다. 욕실에는 칫솔이 두 개 꽂혀 있고, 한쪽은 183일째 마른 채다.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은 이유를 적으라면 적을 수 없다. 비품 목록에 사유란은 없다.
이량이 사라진 것은 지난 5월 16일 금요일이다. 출근하듯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CCTV는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끊겼다. 카드 사용 내역 없음. 휴대폰 신호 소멸. 목격자 없음. 시신 없음. 유서 없음. 채무 없음. 불륜 없음. 다툼 없음.
없음이 열한 개면 경찰은 수사를 멈춘다. 나는 그것을 비난할 수 없다. 나라도 그렇게 분류했을 것이다. 18년간 내가 처리한 실종 관련 클레임은 백 건이 넘고, 나는 그 전부에 결론을 내렸다. 자살이거나, 사기이거나, 사고였다. 예외는 없었다. 예외는 통계의 사각에 사는 짐승이고, 나는 그 짐승을 한 번도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샤워를 하고, 잠을 자는 대신 회사 시스템에 다시 접속했다. 습관이다. 미배정 큐를 훑는데 익숙한 이름이 걸렸다.
피보험자: 김이량.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었다고 쓰고 싶지만, 정확히는 마우스 휠을 굴리던 검지가 0.5초 멈췄다. 이량 앞으로 내가 들어둔 종신보험이 있다. 실종은 사망이 아니므로 청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건이 시스템에 떠 있었다. 누가 청구한 게 아니었다. 본사의 이상 계약 모니터링이 자동 생성한 검토 건이었다.
상태: 판정 보류.
사유 코드: ETC-9.
나는 ETC-9라는 코드를 18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코드표를 열었다. ETC-9: 기존 분류 기준 적용 불가. 그게 다였다. 나는 이 코드를 만든 사람을 찾아가 묻고 싶었다. 9번까지 오는 동안 1번부터 8번은 대체 뭐였느냐고. 그리고 기준 적용이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화면에는 같은 코드의 건수가 함께 떠 있었다. 당사 접수 기준, 최근 1년: 247건.
- 나는 그 숫자를 한참 봤다. 한 회사에서 1년에 247건이 분류 불가라는 뜻이다. 내 직업 전체가 분류라는 뜻이고, 분류가 안 되는 게 247개라는 뜻이다. 둘 중 하나다. 코드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세상이 잘못 만들어지기 시작했거나.
나는 노트북에서 회사 시스템을 닫았다. 그리고 새 폴더를 만들고, 새 문서를 열었다.
문서 제목을 적었다. 사정 로그 #0.
피보험자: 김이량. 1981년생. 키 163. 왼손잡이.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일에 이상하게 재능이 있던 사람. 사고일: 불명. 사고 유형: 불명. 청구인: 신우주. 청구 내용: 결론.
18년간 나는 타인의 실종에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내 차례다.
사정 로그 #1
D+185
이틀 동안 네 시간씩 두 번 잤다. 나머지 시간은 책상에 있었다. 책상에서 한 일을 적는다. 그게 로그라는 물건이다.
실종 클레임이 배정되면 사정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서랍을 여는 것이다. 서랍은 세 개다. 자살. 사기. 사고. 18년간 나는 이 세 서랍으로 실종 관련 클레임 백열두 건을 처리했고, 백열두 건이 전부 들어갔다. 서랍이 모자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살은 흔적을 남긴다. 통장 정리, 검색 기록, 갚아둔 빚, 평소와 다른 안부 전화. 유서가 없는 자살은 많아도 흔적이 없는 자살은 없다. 사람은 떠나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본인은 숨겼다고 생각하지만, 데이터에는 정돈 자체가 지문으로 남는다.
사기는 동기를 남긴다. 돈은 중력이 있어서 반드시 어딘가로 흐른다. 증액된 보험, 만기 직전의 채무, 새로 등장한 수익자. 실종을 위장하는 사람은 살아서 그 돈을 쓸 계획이 있는 사람이고, 계획은 언제나 금융 기록 어딘가에 미리 도착해 있다.
사고는 원인을 남긴다. 마지막 위치, 기상, 지형, 그리고 대개는 시신. 시신이 없어도 신발이 있고, 신발이 없어도 목격자가 있다. 사고는 물리 현상이라서 물리적 잔여물 없이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살은 흔적, 사기는 동기, 사고는 원인. 이 문장을 나는 신입 교육 때마다 칠판에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9년 전 영월 건. 실종 신고 후 11개월, 가족은 입산 실족을 주장했고 정황도 그럴듯했다. 그런데 실종자의 도서관 대출 기록에 산악 지도가 한 권도 없었고, 대신 마지막 석 달간 '채권 소멸시효'에 관한 책이 세 권 있었다. 채무자의 공부는 흔적이다. 그는 14개월 뒤 군산의 찜질방에서 본인 명의 휴대폰을 개통했다. 서랍 2였다.
6년 전 보령 건. 갯바위 낚시 실종, 유족 진술 완벽, 기상 기록 정합. 다만 실종 당일 휴대폰이 꺼진 위치가 갯바위가 아니라 시내 PC방 기지국이었다. 데이터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것도 서랍 2였다. 18년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데이터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직업은 의심이 아니다. 대조다. 진술과 데이터를 나란히 놓고 어긋나는 지점을 찾으면, 사건은 자기 발로 서랍에 들어간다.
절차 이야기를 먼저 해둔다. 회사는 어제 자로 이량 건에서 나를 공식 배제했다. 당연한 조치다. 피보험자의 배우자가 사정사인 사건은 사정사의 배우자가 피보험자인 사건이고, 어느 쪽으로 읽어도 내가 낄 자리는 없다. 건은 본사 특별심사팀으로 넘어갔다.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회사의 조사와 나의 조사는 다른 것이다. 회사는 지급 여부를 묻고, 나는 결론을 묻는다.
그래서 이것은 비공식 조사다. 절차는 공식의 것을 그대로 쓴다. 절차까지 비공식이면 그건 조사가 아니라 짐작이다.
사정의 1단계는 청구 서류 검토다. 양식을 출력해서 청구인 란에 내 이름을 적었다. 피보험자와의 관계: 배우자. 18년간 수천 번 본 양식인데 그 칸이 그렇게 좁은 줄 처음 알았다.
2단계, 증거물 목록화. 이량이 남긴 것: 일기 두 권(약 2년분). 구형 IC 레코더 한 대, 안에 음성메모 314개. 통신사 위치 기록 24개월분(경찰 수사 기록 사본). 카드 명세 24개월분. 그리고 서부경찰서의 얇은 봉투. 이상 다섯 점. 증거물이라고 적고 나니 유품이라는 단어를 피해 간 게 보였다. 못 본 척했다.
3단계, 분류. 서랍을 하나씩 연다.
서랍 1, 자살. 정돈의 흔적을 찾았다. 없었다. 통장은 그대로, 검색 기록은 화분과 라디오 부품과 김치냉장고 할인 정보, 안부 전화의 빈도 변화 없음. 오히려 반대 방향의 기록이 나왔다. 5월 30일 치과 스케일링 예약. 도서관 상호대차 신청 도서 한 권, 예상 도착 6월 둘째 주. 베란다에는 장마 전에 분갈이하려고 사둔 빈 화분이 두 개 있었다. 죽기로 한 사람은 6월에 도착할 책을 예약하지 않는다. 서랍 1, 기각.
서랍 2, 사기. 돈의 중력을 추적했다. 수익자는 나다. 이량이 사라져서 발생하는 금전 이득은, 이량 본인 기준으로 0원이다. 대출 없음, 채무 없음, 현금화 없음. 마지막 6개월의 카드 지출은 오히려 월평균 23퍼센트 줄었다. 줄어든 항목을 봤다. 옷, 외식, 택시. 늘어난 항목은 하나였다. 대전과 금산을 오가는 시외버스 요금. 한 번에 4,900원짜리 지출이 금요일마다 찍혀 있었다. 동기 없음. 서랍 2, 기각. 버스 요금 건은 별도 폴더로 뺐다.
서랍 3, 사고. 마지막 물리적 위치는 대전복합터미널이다. 5월 16일 오전 10시 22분, 매표소 CCTV. 10시 31분, 승강장 입구 CCTV. 그게 끝이다. 그날 10시 40분발 금산행 버스의 차내 영상은 보존 기간 경과로 삭제됐고, 기사는 기억하지 못했다. 탔는지조차 확정이 안 된다. 사고라면 잔여물이 있어야 한다. 시신, 소지품, 신용카드의 마지막 승인, 휴대폰 기지국의 마지막 악수. 전부 없음. 사고는 무(無)를 만들지 못한다. 무는 물리 현상이 아니다. 서랍 3, 기각.
세 서랍이 전부 기각됐다. 18년 만에 처음이다.
나는 이 상황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안다. 이틀 전에 봤다. ETC-9. 기존 분류 기준 적용 불가.
회사 시스템에 들어가서 ETC-9의 이력을 조회했다. 권한 밖 열람이라 징계 사유다. 사유서는 나중에 쓰기로 한다. 코드 신설 시점은 3년 전 2분기 전산 패치였다. 그 전에는 이런 건들이 '기타'로 묶여 있었다. 누군가 기타가 너무 비대해져서 칸을 새로 판 것이다. 연도별 건수를 뽑았다. 재작년 58건, 작년 121건, 올해는 11월 중순까지 247건. 해마다 두 배가 조금 넘는다.
보험업에서 매년 두 배로 자라는 곡선은 두 종류뿐이다. 사기, 아니면 전염병. 사기라면 수법이 있어야 하고 전염병이라면 병원체가 있어야 하는데, ETC-9의 정의 자체가 '그게 안 보인다'는 뜻이다.
연수원 동기한테 전화했다. 다른 회사 실종 클레임 파트에 있는 친구다. 코드 이름은 달랐지만 곡선은 같았다. "우리는 그걸 그냥 '구멍'이라고 불러." 친구가 말했다. "메우는 게 아니라 빠지지 않게 조심하는 거." 업계 전체의 구멍이라는 뜻이다. 내 직업은 분류고, 업계 전체에서 분류가 동시에 고장 나고 있다.
새벽 두 시쯤, 검색을 하다가 해외 포럼 하나에 닿았다. 이름이 NULL FORUM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서 NULL은 0이 아니다. 0은 값이다. NULL은 값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표시다. 실종자 가족들과 아마추어 분석가들이 모여서, 자기 사람을 결측치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자조인데, 정확한 자조였다. 정확해서 잠깐 화면에서 손을 뗐다.
게시판 구성을 봤다. 사례 보고. 데이터. 가설. 그리고 마지막 게시판의 이름은 '기다림'이었다. 글이 제일 많은 곳은 가설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사례 보고 게시판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오하이오의 회계사. 실종 전 8개월간 지출 감소, 동기 없음, 시신 없음, 마지막 위치는 주립공원 주차장. 나고야의 중학교 교사. 실종 전 1년간 "더 밝아졌다"는 가족 진술, 흔적 없음, 원인 없음, 마지막 위치는 동네 버스 정류장. 리옹의 약사. 마르세유의 간호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버스 기사. 직업도 대륙도 다른데 양식이 같았다. 양식이 같으면 그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다. 나는 18년간 사건을 봤지 현상을 본 적이 없다. 현상은 내 관할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이량의 카드 명세를 다시 폈다. 지출 감소, 월평균 23퍼센트. 오하이오의 회계사와 같은 줄에 적힐 수 있는 숫자였다. 같은 줄에 적고 싶지 않아서 명세를 덮었다. 덮고 나서, 덮는 행위가 데이터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18년차답게 알았다. 다시 폈다.
가설 게시판은 예상대로였다. 외계 개입설, 휴거론, 정부 실험설, 신종 질병설, 집단 위장 이민설. 나는 직업병으로 점유율을 셌다. 종교 계열 31퍼센트, 음모 계열 27퍼센트, 질병 계열 18퍼센트, 기타 24퍼센트. 기타가 또 제일 크다. 어디를 가나 기타가 문제다.
회원 가입을 했다. 닉네임을 적는 칸에서 잠깐 멈췄다가, ETC-9라고 적었다.
책상 옆에는 증거물 1번과 2번이 그대로 있다. 일기 두 권과 IC 레코더. 이틀째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못 대는 이유를 절차의 언어로 적자면, 분석자의 객관성 확보를 위한 냉각기다. 절차의 언어는 가끔 쓸모가 있다. 진짜 이유를 적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음성메모 314개. 재생 버튼 한 번이면 이량의 목소리가 나온다. 나는 그 버튼을 6개월간 누르지 않았다. 경찰이 들었고, 특이사항 없음으로 정리했고, 나는 그 요약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타인의 요약으로 버틴 6개월이었다. 사정사가 요약을 믿는 것은 직무 유기다. 내일은 원본을 듣는다. 이것은 결심이 아니라 일정이다. 일정으로 적어야 지켜진다.
로그를 닫기 전에 오늘의 결론을 적는다. 18년간 서랍이 세 개라는 사실은 한 번도 문제였던 적이 없다. 문제는 늘 안 들어가려고 버티는 사건 쪽이었고, 버티는 사건도 결국엔 들어갔다. 오늘부로 정정한다. 사건은 멀쩡하다. 모자란 것은 서랍이다.
네 번째 서랍이 필요하다. 이름은 아직 없다. 라벨 없는 서랍을 책상에 하나 만들어두고, 거기에 이량의 파일을 넣었다. 임시 보관이다. 이 단어도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은 이게 최선이다.
사정 로그 #2
D+190
음성메모 분석에 닷새가 걸렸다. 원래 일정은 사흘이었다. 지연 사유는 뒤에 적는다. 로그는 정직해야 한다.
먼저 방법론. 메모 314개를 레코더에서 추출해 시간순으로 정렬하고,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열은 다섯 개. 일련번호, 녹음 일시, 길이, 키워드, 감정가. 감정가는 5점 척도로 설계했다. 1번 메모에서 이량이 베란다의 콩나물시루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게 3점인지 4점인지 20분을 고민했다. 7번 메모에서 척도를 폐기했다. 측정 도구가 측정 대상보다 엉성하면 폐기하는 게 맞다.
효율을 위해 1.5배속 청취를 시도했다. 두 개 듣고 그만뒀다. 배속을 올리면 목소리의 높이가 변한다. 변한 목소리는 이량의 목소리가 아니고, 이량의 목소리가 아닌 데이터는 원본이 아니다. 데이터 무결성 문제다. 무결성 문제라고 두 번 적은 것은 그게 무결성 문제라서다.
314개를 1.0배속으로 들으면 총 11시간 26분이다. 닷새가 걸린 산수가 이제 맞는다. 같은 메모를 여러 번 들은 횟수는 산수에서 제외했다. 그 변수까지 넣으면 닷새도 안 맞는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유족이 내미는 음성 기록을 나는 직업적으로 여러 번 받아봤다. 그때마다 했던 말이 있다. "녹음은 증거로 약합니다. 목소리는 듣는 사람이 해석하게 되거든요." 받아 적어둔 것처럼 기억나는 이유는, 그 말을 들은 유족들의 표정이 매번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신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닷새 전의 나는 그 표정의 뜻을 몰랐고, 오늘의 나는 안다. 이 단락은 분석에 기여하는 바가 없으므로 비고로 분류한다.
메모의 양식부터 기록한다. 이량의 음성메모는 일기가 아니라 관찰 기록에 가깝다.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 그날 본 것, 그날 만진 것, 그날 이상했던 것. 콩나물의 성장 속도, 앞집 개의 짖는 패턴, 보일러 배관이 새벽에 내는 소리. 이량은 사물을 오래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이름은 메모 314개 중 61개에 나온다. 호칭은 전부 동일하다. 우주 씨.
"우주 씨는 지금쯤 현장이겠다." "우주 씨가 사다 둔 귤이 다 시들었는데, 버리면 서운해할까." "우주 씨는 자는 얼굴이 앨범 속 아홉 살하고 똑같다. 본인만 모른다."
혼잣말에 호칭이 왜 필요한가. 이 질문을 키워드 열에 적었다가 지웠다. 분석 항목이 아니라서 지운 게 아니다. 분석할 자신이 없어서 지웠다. 로그는 정직해야 한다고 위에 적었으므로 이 줄은 남긴다.
시계열 분석으로 넘어간다. 숫자는 다음과 같다.
첫 1년: 주당 평균 3.1개, 평균 길이 1분 40초. 마지막 6개월: 주당 평균 1.2개, 평균 길이 41초. 빈도와 길이가 동시에 감소. 그런데 키워드의 결이 변한다. 첫 1년의 메모에는 '해야 하는데'가 자주 나온다. 마지막 6개월에는 그 말이 사라진다. 대신 '봤다'가 늘어난다. 할 일의 목록이 줄고 본 것의 목록이 늘어난다.
'봤다'의 사례를 몇 개 옮긴다. 192번. "정류장 옆 은행나무가 이틀 만에 다 노래졌다. 나무는 절차가 빠르다." 233번. "버스 창에 서리가 슬었는데, 숨을 불면 동그랗게 열린다. 열린 데로만 보면 다 새것 같다." 271번.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걸 알면서 했다." 271번을 키워드로 분류하려고 셀을 클릭했다가, 빈칸으로 두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빈칸도 데이터다. 이 핑계는 방금 만들었다.
목소리도 변한다. 이것은 수치화가 안 되는데, 시도는 해봤다. 말의 속도가 분당 평균 14퍼센트 느려졌다. 느려졌다는 게 처졌다는 뜻이 아니다. 급한 데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마지막 몇 달의 이량은, 정확히 적겠다, 행복하게 들린다.
일기와도 교차 검증을 했다. 일기 두 권은 메모보다 건조하다. 날짜, 날씨, 한 일 두세 줄. 메모가 목소리라면 일기는 장부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권의 후반부다. 글이 줄어드는 자리에 그림이 들어온다. 볼펜으로 그린 작은 도식들. 동심원, 화살표, 사다리꼴 위에 얹힌 접시 모양.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잘 그리려는 그림도 아니다. 본 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림이다. 나는 사다리꼴 위의 접시를 한참 봤다. 어디서 본 형태인데 출처가 인출되지 않았다. 검색 키워드를 못 정해서 보류했다. 보류 대기열이 길어지고 있다.
여기서 과거 기록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작년 겨울, 나는 이량의 변화를 감지하고 분류를 했었다. 말수가 줄었다. 모임에 안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주, 설거지를 하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을 느껴서 돌아보면 웃고, 다시 하던 일을 했다. 18년차 사정사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패턴은 우울증 전조였다. 나는 병원 이야기를 꺼냈고, 이량은 가겠다고 했고, 실제로 한 번 갔고, 특이소견 없음을 받아왔고, 나는 오진을 의심했다.
그때 부엌에서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이량은 행주를 짜면서 대답했다. "아니. 반대야."
나는 그 '반대'를 후속 질문 없이 종결 처리했다. 무슨 일이 없다는 뜻으로 분류한 것이다. 지금 314개의 메모를 듣고 나서 그 단어를 다시 사정한다. 반대.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없어지고 있다는 뜻이었을 가능성. 비어가는 게 아니라 차오르는 중이었을 가능성. 내 분류가 틀렸을 가능성.
오분류는 사정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일어나면 정정 보고서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건의 정정 시한이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더 쓰지 않는다.
메모 가운데 출처를 모르는 인용이 하나 있다. 281번, 올해 3월 6일 금요일, 저녁 7시 14분.
"선생님이 오늘 그랬다. 라디오는 고장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조용해지는 거라고. 고장이면 고치면 되고, 조용해진 거면. 음. 뒷부분은 안 가르쳐줬다. 다음 주에 알려준대. 우주 씨 같으면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나."
선생님이 누구인지 메모 전체를 검색했다. '선생님'은 마지막 1년의 메모에 아홉 번 나오는데, 이름도 장소도 한 번도 안 나온다. 금요일 메모에만 나온다. 금요일. 카드 명세의 4,900원과 같은 요일이다. 키워드 열에 적었다. 선생님(금), 신원 미상, 최우선 추적 대상.
이량은 라디오를 좋아했다. 이건 원래 알던 데이터다. 주파수 다이얼을 돌리면 방송국 사이의 빈 구간에서 멈추는 버릇이 있었다. 잡음을 듣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은 적이 있다. 빈 데가 제일 멀리서 오는 거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농담으로 분류했다. 이 건도 재분류 대기열에 넣는다. 대기열이 길어지고 있다.
마지막 메모 이야기를 하고 로그를 닫는다.
314번. 5월 9일 금요일 저녁 8시 2분. 길이 3분 41초. 마지막 6개월 평균의 다섯 배가 넘는, 명백한 이상치다.
내용의 전반부는 사무적이다. 김치냉장고 아래 칸에 새로 담근 게 있다는 것. 베란다 화분에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라는 것. 보일러는 외출 모드가 고장이라 끄지 말고 둘 것. 듣다 보면 출장 가는 사람의 메모 같다. 경찰도 그렇게 들었을 것이다. 특이사항 없음.
특이사항은 후반부다. 1분 52초부터 끝까지, 이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끊은 게 아니다. 녹음은 계속된다. 숨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개가 짖고, 이량은 거기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다. 1분 49초 동안. 그리고 녹음이 끝난다.
이 침묵을 어느 열에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때 침묵하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클 때도 침묵한다. 데이터만으로는 둘을 구분할 수 없다. 나는 그 1분 49초를 열한 번 들었다. 열한 번째도 1분 49초였다.
파형도 띄워봤다. 침묵은 시각적으로 평평하지 않았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잠든 사람의 호흡은 이렇게 규칙적이지 않고, 우는 사람의 호흡은 더더욱 아니다. 편안한 사람의 호흡이다. 떠나기 일주일 전, 출장 가는 사람의 메모를 남기고, 이량은 편안하게 숨을 쉬며 1분 49초 동안 거기 앉아 있었다. 무엇을 향해 앉아 있었는지는 파형에 안 나온다.
침묵 구간에 미세한 배경 잡음이 있긴 하다. 쉬익, 하는, 채널 사이의 빈 곳 같은 소리. 레코더가 7년 된 물건이니 마이크 열화로 추정. 비고란에 한 줄 적고 넘어간다.
오늘의 결론. 이량은 떠나기 전 2년 동안 행복해지고 있었다. 행복은 자살의 전조가 아니고, 사기의 동기가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 아니다. 행복은 내 직업이 다루는 변수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한 번 우울로 오분류했고, 이번에는 분류 없이 적어만 둔다.
다음 조사 대상: 선생님(금). 금요일의 4,900원이 어디서 내리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만 순서는 지킨다. 사정의 철칙 하나. 현장은 서류가 끝난 다음이다. 현장은 한 번뿐이고, 준비 없이 밟은 현장은 오염된다. 이량의 서류는 아직 안 끝났다. 남은 서류: NULL FORUM의 데이터 게시판에 쌓인 해외 사례들, 그리고 정부 통계의 구멍. 서류를 끝내고, 금요일에 간다. 이량이 타던 요일의, 이량이 타던 버스로. 재현은 같은 조건에서 해야 의미가 있다. 이것은 직업 원칙이고, 직업 원칙이라고 적으면 그 금요일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적는다.
사정 로그 #3
D+197
영상 하나에 일주일을 썼다. 결론부터 적는다. 무조작. 근거는 아래에 있다. 이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근거보다 아래에 있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았다.
발단은 NULL FORUM 데이터 게시판이다. 해외 사례 232건을 내 분류 체계로 코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간 집계만 적어둔다. 232건 중 세 서랍 어디에도 안 들어가는 건이 187건. 그 187건에서 반복되는 변수가 셋 있다. 실종 전 6개월에서 2년 사이의 지출 감소. 사회적 모임 이탈. 그리고 가족 진술란에 묘하게 자주 나오는 한 문장. "오히려 더 좋아 보였어요." 슬픔의 전조를 찾는 설문에 행복이 출력되는 데이터셋이다. 187건 중 기록이 분석 가능한 수준으로 남은 건은 37건. 별도 폴더로 추렸다. 이 폴더는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다.
코딩 사흘째 되던 날 포럼 전체가 한 게시물로 쏠렸다. 제목은 단순했다. "CCTV — 실종 4.2초 전."
휴스턴 외곽의 셀프 주유소 방범 카메라 영상이었다. 길이 41초. 새벽 5시 51분. 한 남자가 주유기 옆에 차를 세워두고 편의점 쪽으로 걸어간다. 화면 기준 좌측에서 우측으로, 11걸음. 남자는 그 주 화요일에 실종 신고된 47세 배관공이고, 차는 그 자리에서 사흘 뒤 발견됐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지갑은 조수석에 있었다.
영상의 문제 구간은 마지막 4.2초다. 남자의 윤곽이 흐려진다. 초점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데, 배경의 주유기와 가격 표지판은 초점이 멀쩡하다. 남자만 흐려진다. 노출이 틀어진 것처럼 밝아지는데, 남자 주변 1미터만 밝아진다. 그리고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남자가 없다.
걸어가던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쓰러지지도, 뛰지도, 화면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한 프레임에 흐릿하게 있고, 다음 프레임에 없다. 30분의 1초. 그게 전부다.
포럼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조작이다, 아니다. 양쪽 다 근거가 빈약했다. 조작파의 최강 논거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였고, 진본파의 최강 논거는 "내 남편도 저랬을 것이다"였다. 둘 다 데이터가 아니다. 하나는 신념이고 하나는 소망이다.
나는 영상 포렌식을 할 줄 안다. 자랑이 아니라 업무다. 보험사기의 3할은 영상과 함께 접수된다. 블랙박스, CCTV, 휴대폰 동영상. 18년간 조작 영상을 31건 적발했다. 수법은 진화하는데 들키는 자리는 안 변한다. 합성은 경계에서 들킨다. 원본과 가짜가 만나는 솔기. 거기서 노이즈의 결이 어긋난다.
원본 파일을 구했다. 게시자는 실종자의 동생이었고, 주유소 점주에게 받은 저장 원본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해시값을 대조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검사 항목과 결과를 적는다. 첫째, 재인코딩 흔적. 인코딩은 한 번뿐이었다. 카메라 펌웨어의 표준 출력 그대로. 둘째, 센서 노이즈 지문. 카메라 센서에는 기기 고유의 노이즈 패턴이 있다. 문제 구간과 정상 구간의 지문이 일치했다. 영상 전체가 한 카메라에서 한 번에 나왔다는 뜻이다. 셋째, 프레임 보간 검사. 프레임을 지우거나 끼워 넣으면 시간축에 박음질 자국이 남는다. 없었다. 넷째, 조명 정합. 새벽 5시 51분 휴스턴의 태양 고도와 가로등 위치로 그림자 각도를 검산했다. 나는 토요일 밤에 휴스턴의 태양 고도를 계산하고 앉아 있는 마흔여섯 살이다. 그림자는 전부 물리 법칙 편이었다.
다섯째. 이게 중요한데, 문제의 흐려짐 자체를 분석했다. 디지털 블러에는 알고리즘의 서명이 있다. 가우시안이든 모션이든, 계산된 흐림은 균질하다. 이 흐림은 균질하지 않았다. 남자의 윤곽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빛이 휘는 방식이, 렌즈 앞에 뜨거운 공기가 있을 때의 굴절과 비슷했다. 비슷하고, 같지는 않았다. 결론. 이 흐림은 편집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렌즈 앞 현실에서 일어났다.
판정. 무조작. 카메라는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저장했다.
판정을 내린 시각이 새벽 2시 40분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지 않고, 폴더 하나를 더 열었다. 경찰 수사 기록 사본. 대전복합터미널, 5월 16일, 승강장 입구 CCTV.
6개월 동안 마흔 번쯤 본 영상이다. 이량이 화면 하단에서 등장해서, 9초간 걸어서, 기둥 뒤로 사라진다. 기둥 뒤는 다른 카메라 관할인데 그 카메라에 이량은 나타나지 않는다. 수사 기록은 그 불연속을 '카메라 사각'으로 정리했다. 나는 오늘 그 9초를 프레임 단위로 다시 봤다. 휴스턴에 쓴 검사 항목 그대로. 흐려짐, 국소 노출 이상, 윤곽의 굴절. 찾는 게 있었고, 찾는 게 있다는 사실에 손이 차가워졌다.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터미널 카메라는 주유소 카메라보다 화소가 낮고, 이량은 화면에서 멀고, 새벽이 아니라 오전이라 노출의 미세 변화가 묻힌다. 검출 한계 이하.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화질.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 영상의 화질을 원망하는 대신 고마워하는 나를 적발했다. 판정이 안 나오는 동안에는 모든 가능성이 살아 있다. 이 심리에는 직업적 명칭이 있다. 판정 회피. 유족들이 하는 것이다.
판정문을 포럼에 올렸다. 검사 항목, 사용 도구, 재현 절차 전부 포함해서. 누구든 같은 절차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그게 판정이라는 행위의 최소 조건이다. 글은 여섯 시간 만에 포럼 역대 조회수 2위가 됐다. 1위는 어느 실종자 어머니가 쓴 "아직 밥솥을 못 버리겠습니다"라는 글이다. 1위가 그 글인 커뮤니티라서 나는 거기 글을 올린다.
판정문에 달린 댓글 첫 페이지는 대부분 고맙다는 말이었다. 고마울 일이 아니라고 답하려다 말았다. 그 사람들이 고마워한 것은 판정이 아니라, 자기 사람의 마지막 장면이 가짜가 아니라는 확인이었다. 마지막 장면이 이상할수록 진짜이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을, 나는 이제 통계 바깥에서 안다.
댓글에서 두 번째 작업거리를 얻었다. 한 회원이 물었다. "흐려질 때 색깔 보신 분 있나요? 영상 말고, 직접 본 분." 답글이 쉰일곱 개 달렸다.
목격담을 전수 수집했다. 포럼 안팎에서 긁어모은 직접 목격 진술 19건. 7개 언어권, 게시 시점은 이 영상 공개 이전이 14건. 서로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교차 오염 가능성 낮음. 진술을 원문 그대로 코딩했다.
리스본의 진술. "비누방울 표면 같은 게 그 애를 감쌌어요." 오사카의 진술. "주차장 기름막에 뜨는 색. 그게 공중에 있었습니다." 산티아고의 진술. "성당 유리를 통과한 빛인 줄 알았는데 거긴 유리가 없었어요." 그리고 대구의 진술. "사라지기 전에, 그 사람 주변이 무지갯빛으로 일렁였어요."
19건 중 16건이 색을 언급한다. 16건 전부가 다색(多色)을 언급한다. 빨간빛도 흰빛도 아니다. 전부 스펙트럼이다. 비누방울, 기름막, 프리즘, 무지개. 단어는 다른데 가리키는 광학 현상이 같다. 담합이 불가능한 표본에서 나온 일치는 데이터다. 18년간 내가 배운 것 중 가장 값비싼 명제다. 보통은 사기를 잡는 데 썼다. 오늘은 처음으로 사기가 아닌 쪽을 잡는 데 썼다.
스프레드시트에 새 열을 만들었다. 열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광학 이상. 색채 현상. 다 모자랐다. 결국 목격담에서 제일 많이 나온 단어를 그대로 썼다. 일렁임.
그사이 바깥세상도 영상을 발견했다. 영상은 포럼을 벗어나 사흘 만에 조회수 4천만이 됐고, 해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휴거가 시작됐다는 설교가 도착했고, 신종 신경 질환이라는 의사의 인터뷰가 도착했고, 집단 히스테리이자 딥페이크 시대의 대중 망상이라는 교수의 칼럼이 도착했다. 셋 다 영상을 봤고, 셋 다 자기가 원래 하던 말을 했다. 새 데이터가 기존 결론을 하나도 안 바꾸는 광경을, 나는 일주일 동안 실시간으로 봤다.
직업적으로 익숙한 광경이긴 하다. 사기꾼도 그런다. 증거를 들이밀면 증거를 자기 이야기 속의 소품으로 바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기꾼은 자기가 그러는 줄 알면서 그런다는 것이다.
휴스턴의 주유소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역 방송 인터뷰에서 점주가 한 말을 받아 적는다. "다들 4번 주유기 앞에서 사진을 찍어요. 기름은 안 넣고요." 어느 시대든 성지의 경제학은 같다. 점주는 그 자리에 테이프로 동그라미를 쳐뒀다가 본사 지시로 뗐다고 한다. 동그라미를 친 것도 사람이고 떼라고 한 것도 사람이다. 나는 양쪽 다 이해가 갔고, 양쪽 다 이해가 간다는 게 이 일의 요약 같았다.
오늘의 결론.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31건의 조작을 잡는 동안 카메라가 거짓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짓말은 언제나 카메라 앞이나 뒤의 사람이 했다. 이번 건에서 카메라는 정직했고 사람도 정직했다. 그렇다면 남는 용의자는 하나다.
세계 쪽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이 문장을 적고 10분간 들여다봤다. 18년차 손해사정사의 로그에 적힐 문장이 아니다. 지우지는 않겠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의 문장이고, 나는 데이터를 지우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보류 폴더에 넣는다. 보류 폴더가 점점 본 폴더보다 커지고 있다. 이런 비율 역전을 나는 업무에서 본 적이 있다. 회생 불가능한 회사의 장부에서.
다음 금요일에 금산에 간다. 서류는 거의 끝났다. 남은 것은 정부 통계의 구멍 하나다. 실종 통계의 공표치와 업계 체감치가 어긋나는 문제. 그건 오늘 정보공개청구를 접수했다. 접수에 5분, 답변에 열흘. 관공서의 시간은 어디서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 열흘 안에 금산을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취리히의 곡선
취리히 — 같은 해 9월
재보험은 보험의 보험이다. 개인이 감당 못 할 위험을 보험사가 받고, 보험사가 감당 못 할 위험을 재보험사가 받는다. 위험은 위로 갈수록 농축된다. 따라서 세계의 종말에 관한 가장 정확한 데이터는 교회나 정부가 아니라 취리히와 뮌헨의 몇몇 건물 안에 있다. 그 건물들은 종말을 믿지 않는다. 가격을 매길 뿐이다.
알프스 리(Re)의 생명 부문 수석 모델러 모니카 헤스는 마흔한 살이고, 혼자 살고, 사람을 데이터로 읽는다. 동료들은 그것을 차갑다고 부르지만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녀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진술보다 사람의 분포를 신뢰할 뿐이다. 진술은 거짓말을 하고 분포는 하지 않는다. 그녀의 거실에는 텔레비전이 없고 창가에 의자가 하나 있다. 퇴근하면 그 의자에 앉아 호수를 본다. 호수는 곡선이 없는 풍경이다. 하루 종일 곡선을 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곡선이 없는 한 시간이라고, 그녀는 오래전에 계산해 두었다.
그녀가 사람을 데이터로 읽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열아홉이던 해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신은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한 여자의 가출이었다. 경찰은 성인의 자발적 실종에 손대지 않았고, 어린 모니카는 어머니의 마지막 몇 달을 거꾸로 분석했다. 통화 기록, 가계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산 것들. 슬픔을 다루는 법을 몰랐으므로 데이터를 다뤘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곁에 있으면 덜 외로웠다. 그렇게 그녀는 계리사가 됐다. 어머니의 실종을 평생 한 번도 곡선 위의 점으로 떠올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 분기의 곡선을 보기 전까지는.
그 분기에 그녀가 받은 과제는 사소했다. 사망보험 포트폴리오에서 '시신 부재 실종' 관련 지급 유보 건의 적립금 산정 기준을 갱신하는 일. 마흔 개국의 원수사(原受社)에서 올라온 데이터를 모델에 넣는 데 이틀, 결과를 의심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곡선이 나왔기 때문이다.
실종은 원래 곡선을 만들지 않는다. 실종은 잡음이다. 전쟁, 재해, 경기 침체에 따라 출렁이고, 출렁임이 끝나면 기저선으로 돌아간다. 백 년 치 보험 통계에서 실종이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문법이다. 그런데 지난 9년의 데이터는 출렁이지 않았다. 올라갔다. 마흔 개국에서, 전쟁과 무관하게, 재해와 무관하게, 환율과 물가와 실업률과 무관하게, 연평균 11.3퍼센트씩, 한 번의 후퇴도 없이.
11.3퍼센트는 작은 숫자처럼 들린다. 계리사는 그렇게 듣지 않는다. 복리의 언어에서 연 11.3퍼센트는 6년 반마다 두 배가 된다는 뜻이다. 두 배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 모든 것은,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전부가 된다.
헤스는 모델을 세 번 다시 돌렸다. 변수 정의를 바꾸고, 이상치를 제거하고, 국가별 보고 기준의 차이를 보정했다. 기울기는 변하지 않았다. 보정할수록 곡선은 매끄러워졌다. 매끄러움이야말로 문제였다. 자연적 사회 현상은 이렇게 매끄럽지 않다. 이 곡선에는 마찰이 없었다. 마치 사회 바깥에서 오는 것처럼.
그녀는 과거로 파보았다. 회사 문서고에는 1953년부터의 인수 기록이 있었다. 곡선은 과거에도 있었다. 기저선이라고 모두가 불러온 잡음의 바닥에, 아주 낮게, 그러나 일관되게. 달라진 것은 곡선의 존재가 아니라 배증 기간이었다. 반세기 전에는 두 배가 되는 데 40년이 걸렸다. 지금은 6년 반이다. 무언가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늘 있던 무언가가 가속하고 있었다.
10월의 둘째 주, 헤스는 분기 리스크 위원회에서 17분을 배정받았다. 슬라이드를 여섯 장 준비했고, 마지막 장에는 외삽 그래프 하나만 넣었다. 현재 추세 유지 시, 생명보험의 가격 산정 기반인 사망률표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시점: 2050년대. 그리고 그 너머.
"이 곡선이 맞다면, 2060년대에 보험이라는 산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침묵하지 않았다. 침묵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위원회는 곧바로 토론을 시작했고, 토론은 생산적이었다. 데이터 정의의 문제가 지적됐다. 각국 실종 신고 제도의 행정적 변화가 교란 변수로 제시됐다. 보고 편의(reporting bias)의 가능성이 논의됐다. 모든 지적은 합리적이었다. 회의는 결론을 냈다. 해당 리스크를 '신흥 리스크 관찰 목록'에 등재하고, 관련 상품의 요율을 보수적으로 재산정하며, 차기 분기에 재검토한다.
문명이 자기 종말의 곡선을 처음으로 집계한 날, 문명은 그것을 관찰 목록에 등재했다.
헤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그 절차를 설계한 사람 중 하나였고, 절차는 옳았다. 미지의 위험 앞에서 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가격을 다시 매기는 것이다. 기관은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그것을 잘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날 밤 그녀는 사무실에 남아 데이터를 국가별로 다시 펼쳤다. 마흔 개의 곡선이 마흔 개의 언어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 국가의 곡선 위에 커서를 올렸다. 원수사 주석란에 영어로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표준 분류 실패 건 급증. 현지 업계 비공식 명칭: '구멍'. 신규 코드 신설로 대응 중."
구멍. 헤스는 그 단어를 잠시 보았다. 마흔 개국의 보험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구멍의 이름을 짓고 있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인간이 구멍 앞에서 하는 첫 번째 일이다. 두 번째 일은 구멍의 가격을 매기는 것이고, 세 번째 일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어느 보고서에도, 세 번째 일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외삽 그래프를 한 장 출력해서 모니터 옆 코르크보드에 핀으로 꽂았다. 가로축은 시간이고 세로축은 사라진 사람의 수였다. 곡선은 오른쪽 위를 향했다. 종이 위에서 그것은 성장 그래프와 구분되지 않았다. 매출, 인구, 연산력, 그리고 실종. 위로 가는 모든 곡선은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상한 것은 데이터의 결이었다. 그녀는 자살 클레임을 십수 년 다뤘다. 스스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데이터에는 공통의 표정이 있다. 직전의 소비 급변, 검색 기록의 어두운 쏠림, 보험 증액. 무너지는 사람은 무너지기 전에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이 '구멍'의 사람들은 정반대였다. 사라지기 전 몇 달, 그들의 데이터는 고요해졌다. 소비가 단순해지고, 분쟁 기록이 사라지고, 채무가 정리됐다. 보험 통계에서 가장 건강한 신호들이, 사라지기 직전에 켜졌다. 무너져서 사라지는 사람의 모델은 천 가지가 있었다. 정돈되어 사라지는 사람의 모델은, 그녀에게 없었다.
알프스 리의 한 층 위에는 안톤 베르거가 있었다. 인구통계 부문의 노(老)모델러로, 정년을 두 번 미룬 사람이었다. 헤스가 곡선을 들고 올라가자 베르거는 안경을 벗고 한참 화면을 봤다. "이 마찰 없는 매끄러움 말이야." 그가 말했다. "나는 이런 걸 딱 한 번 봤어. 냉전 시대 어느 인구 통계에서. 그런데 그건 조작이었지. 매끄러운 건 대개 누가 손을 댄 거야." 그는 안경을 다시 썼다. "이건 손댄 흔적이 없는데도 매끄러워. 그게 더 무섭군." 베르거는 말수가 적었고, 데이터 앞에서 오래 침묵하는 버릇이 있었다. 헤스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에서 그 곡선을 보고 농담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 주 내내 헤스는 곡선이 틀렸기를 바라며 일했다. 좋은 모델러는 자기 결과를 가장 먼저 의심한다. 그녀는 데이터 입력 오류를 의심했고, 코드의 버그를 의심했고, 원수사들의 보고 기준 변화를 의심했다. 사흘 밤을 새워 가능한 모든 오류원을 제거했다. 제거할수록 곡선은 더 단단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가장 비전문적인 검증을 했다. 동료 모델러 다섯에게 데이터만 주고 같은 분석을 시켰다. 다섯이 다섯 다 같은 기울기를 보고했다. 11.3퍼센트. 그제야 그녀는 곡선을 믿었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는 데에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보다 늘 더 많은 증거가 든다. 그녀는 그 비대칭을 직업의 윤리로 삼아 왔다. 그날 밤 그녀는 모델이 틀렸기를 바라는 일을 그만뒀다. 모델은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세계 쪽이었다. 아니, 틀렸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았다. 세계가 그녀가 모르는 문법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녀의 모델은 그 문법을 숫자로 받아 적은 첫 번째 받아쓰기였다.
창밖에서 취리히는 평소의 야경이었다. 호수는 어둡고, 구시가의 불빛은 안정적이고, 신용은 견고했다. 저 도시의 모든 불빛이 어떤 형태로든 보험에 들어 있다고, 헤스는 생각했다. 인류는 측정할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비를 마친 종(種)이었다. 다만 위험의 정의가 하나 빠져 있었다. 사람들이 불행해져서 사라지는 경우는 천 가지 모델이 있었다. 사람들이 행복해져서 사라지는 경우는, 모델이 없었다.
전화가 온 것은 11월 초였다. 발신자는 자신을 한 국제 실무그룹의 조정관이라고 소개했다. 인구통계의 비공개 협의 채널이며, 그녀의 분기 보고서가 회원국 옵서버를 통해 회람됐다고 했다. 목소리는 정중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헤스 박사님의 곡선을 봤습니다. 우리는 같은 곡선을 마흔 개의 책상에서 따로 보고 있었습니다. 박사님은 그걸 하나로 그린 첫 사람이고요." 짧은 침묵. "부탁이 있습니다. 그 곡선의 기울기를 늦출 정책을 설계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남겨질 수십억을 위해서."
헤스는 답하기 전에 코르크보드를 한 번 봤다. 곡선은 여전히 오른쪽 위를 향하고 있었다. 막을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모델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평생 모델이 있는 쪽에 서 왔다.
"자료를 보내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사정 로그 #4
D+202
통계 이야기를 먼저 정리한다. 이번 건은 사람이 나오는데, 사람 이야기는 정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정보공개청구에 적은 질문은 한 줄이다. 최근 5년간 실종 신고 접수 건수, 처리 결과별 세부 분류, 그리고 '미발견 종결' 건수의 연도별 추이를 공개하라. 첨부 자료로 업계 추정치를 붙였다. ETC-9 곡선, 타사 '구멍' 곡선, NULL FORUM의 국내 사례 집계. 셋을 합치면 공표 통계로 설명이 안 되는 잔차가 나온다. 공표되는 장기 미발견 실종은 연간 천 단위 초반이다. 업계가 체감하는 숫자는 그 세 배다.
세 배는 오차가 아니다. 오차는 퍼센트로 온다. 배수로 오는 것은 정책이다.
답변 예정일은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전화는 어제 왔다. 모르는 번호였고, 받으니 상대방이 7초쯤 말이 없었다. 7초 침묵 후에 나온 첫 문장이 이랬다. "정보공개청구 담당자는 아닙니다만, 청구서를 보게 된 사람입니다."
통계청 인구동태특이분석과. 직함은 팀장인데 팀원이 없는 팀장이라고 했다. 만나서 들은 농담이 아니다. 전화에서 자기소개로 한 말이다. 농담으로 분류해야 할지 사실로 분류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양쪽 다일 것이다.
만나기 전에 부서를 조사했다. 사정사는 상대를 만나기 전에 상대의 서류를 만난다. 인구동태특이분석과는 4년 전에 신설됐고, 신설 당시 보도자료가 한 건 있는데 제목이 '인구 통계 품질 제고를 위한 조직 개편'이다. 그 후 4년간 보도자료 0건, 발간물 0건, 조직도상 위치는 국 직속 끝자리. 통계 조직이 4년간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 경우뿐이다. 일이 없거나, 일이 발표 불가능하거나. 부서명에 '특이'가 들어가는 쪽은 보통 후자다.
점심시간에 청사 동문 건너편 국밥집에서 만났다. 구석 자리를 잡길래 직업적으로 봤다. 출입문과 창이 다 보이는 자리였다. 공무원이 앉는 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알 것 같은 자리 선정이었다.
강 팀장은 마흔 안팎이고, 공무원증을 목에 건 채로 나와서 자리에 앉으며 뒤집어 넣었다. 그리고 명함 대신 질문을 줬다. "첨부하신 추정치, 어디서 만드신 겁니까."
"제가 만들었습니다. 회사 데이터에 업계 데이터, 커뮤니티 집계를 보정해서 합쳤습니다."
"보정 방법론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나는 방법론을 설명했다. 중복 제거 기준, 신고 시점과 발생 시점의 보정, 커뮤니티 데이터의 신뢰 가중치. 강 팀장은 수첩을 꺼내지 않고 들었다. 다 듣고 나서 국밥을 두 술 뜨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민간에서 그 숫자를 재구성한 사례는 처음 봅니다."
"공식 숫자가 따로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공식적으로는, 공표 통계가 공식 숫자입니다." 행정의 언어는 동어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표 기준의 변경에 따라 일부 항목의 시계열 단절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행정 문어체는 주어가 없는 언어다. 변경은 '있었던 것으로 알'아지고, 단절은 스스로 일어난다. 책임이라는 주어를 문법에서 미리 제거해둔 언어. 18년간 관공서 문서를 읽어온 나는 그 언어를 유창하게 듣는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왔을 때, 문체가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세 배예요, 사정사님." 강 팀장은 국밥집 천장 모서리를 한 번 보고 말했다. "기준을 어떻게 바꾸면 세 배가 접힙니까. 제가 그 보고서를 다섯 번 올렸습니다."
"올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려옵니다." 그는 손바닥을 천천히 뒤집었다. "우리도 압니다. 다 압니다. 그런데 '사회 불안 방지'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게 닫힙니다. 그 단어는 도장이 아니라 자물쇠예요. 반론 절차가 없습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화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출력물도 파일도 아닌, 모니터를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 그 매체 선택이 말해주는 바를 나는 안다. 그래프였다. 축 라벨은 잘려 있었다. 월별 곡선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갔다. 특이점이 없었다. 명절에도, 연말에도, 계절이 바뀌어도, 곡선은 계단 없이 올라갔다. 사회 현상은 계단으로 움직인다. 계단이 없는 것은 사회 바깥에서 미는 것이다.
"실종이 아니라 무슨, 방사성 붕괴 그래프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저희 과 표현으로는." 그가 휴대폰을 거두며 말했다. "'깨끗하다'고 합니다. 통계에서 깨끗한 건 칭찬이 아닙니다."
나는 정리해서 되물었다. "정리하면, 통계청은 실제 수치를 집계하고 있고, 공표 단계에서 다른 부처 협의로 축소되고 있고, 그 근거는 비공개라는 말씀이죠."
강 팀장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렇게 정리되면, 제가 말씀드린 게 됩니까."
"아니요. 제가 추정한 게 됩니다."
"사정사님들은 다 그렇게 말씀을 잘하십니까."
"거짓말을 직업적으로 듣다 보면 참말의 어순을 알게 됩니다."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얼굴 근육의 짧은 오작동에 가까웠지만, 기록한다.
국밥이 다 식고 나서 그가 물었다. "청구서에 가족 사항은 없었습니다만." 그는 거기서 끊었다. 묻는 법을 아는 사람은 문장을 다 쓰지 않는다.
"아내입니다. 6개월 됐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의 말을 고르는 침묵이 아니었다. 위로의 말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끝나고 그가 한 말은 이랬다. "그 천 단위 너머의 세 배 안에, 통계로는 안 잡히는 열이 하나 있습니다. 남은 사람 수입니다. 실종자 한 명당 평균 2.3명의 직계가 남습니다. 저는 그 열을 비공식적으로 유지합니다. 위에서는 그 열을 '감성 변수'라고 부릅니다." 그는 숟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저는 그 호칭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가에도 서랍이 있다는 것을 오늘 배웠다. 국가의 서랍은 세 개가 아니라 하나이고, 라벨에는 '사회 불안 방지'라고 적혀 있다.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서랍이다. 내 세 서랍은 적어도 결론을 출력했다. 국가의 서랍은 입력 전용이다.
점심값은 각자 냈다. 그가 그렇게 하자고 했고, 나는 그 제안의 뜻을 안다. 빚의 단위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 이 사람은 선을 아는 사람이고, 선을 아는 사람이 선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물었다. "왜 전화하셨습니까. 답변서만 보내도 됐을 텐데요."
강 팀장은 가방끈을 고쳐 매며 답을 골랐다. "5년 동안 그 숫자를 저 혼자 봤습니다. 과 이름에 '특이'가 들어가는 부서는 청사에서 저희뿐입니다. 특이하다는 건, 아무도 안 본다는 뜻이거든요." 그는 횡단보도 신호를 한 번 놓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청구서를 보니까, 바깥에 한 명 더 있더라고요. 같은 숫자를 보는 사람이."
같은 숫자를 보는 사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일을 정확히 적기 어렵다. 6개월간 나는 혼자 보는 숫자들을 늘려왔다. 247, 314, 4,900, 1분 49초. 숫자는 늘었는데 보는 사람은 줄곧 한 명이었다. 오늘 점심, 횡단보도 앞에서, 한 명이 두 명이 됐다. 두 배다. 복리로 치면 대단한 증가율이다. 이 농담은 강 팀장한테는 안 했다. 공무원에게 복리 농담은 위험하다.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다. 이게 오늘의 핵심 데이터다.
"사정사님이 보시는 그 현상 말입니다. 해외에서는 이걸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더군요. 국제 협의 문서에 슬쩍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지침이 아직 없어서, 저희는 원어 약자로만 적습니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다 돌아서서, 차 소리 사이로 한 마디를 던졌다. 알파벳 세 글자였다. 내 위치에서는 두 글자만 들렸다.
돌아와서 검색했다. 두 글자로는 안 나왔다. 국제기구 문서 검색에 약자를 조합해서 넣어봤지만, 점심 한 끼 분량의 정보로 찾기에 세상의 약자는 너무 많다. 검색을 멈추고 로그를 적는 지금, 이 항목은 미결로 둔다. 미결 항목이 또 늘었다. 다만 이번 미결은 결이 다르다. 답이 없는 미결이 아니라, 답이 어딘가에 이미 적혀 있는 미결이다.
기록 보충. 강 팀장과의 대화에서 확정된 사실 둘. 첫째, 국가는 이 현상을 집계하고 있다. 둘째, 국가는 그 집계를 시민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안심이고 둘째는 문제인데, 둘을 합치면 셋째가 나온다. 국가가 숨길 만큼 숫자가 크다.
오후에는 터미널에 갔다. 내일 표를 끊기 위해서였고, 무인 발권기로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매표소 창구로 갔다. 6개월 만의 대전복합터미널이었다. 수사 초기에 두 번 왔었다. 그때는 경찰과 함께였고 화면 속 장소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오늘은 혼자였고 화면 밖에 서 있었다.
매표소 위의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5월 16일 10시 22분에 이량을 마지막으로 찍은 기계다. 렌즈는 어른 엄지손톱만 했다. 저 작은 유리가 내 6개월의 기점이다. 나는 그 아래에 서서 표를 샀다. "금산. 내일 10시 40분. 한 장이요." 창구 직원은 7번 좌석이 비었다고 했다. 비고: 7번은 이량의 영수증 번호로 조회한 좌석이다. 일부러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금요일 오전의 금산행은 늘 자리가 남고, 창가부터 팔린다.
승강장 입구까지 걸어봤다. 매표소에서 73걸음. 이량의 화면 속 9초 구간을 내 걸음으로 지나서, 기둥 앞에 섰다. 기둥 뒤는 그냥 승강장이었다. 사각(死角)은 현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카메라가 게을러지는 각도일 뿐이다. 나는 거기 잠시 서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피해 갔고, 안내 방송이 어딘가의 출발을 알렸다. 현장 답사 항목: 종료.
서류 조사는 여기까지. 내일부터 현장이다. 짐을 쌌다. 노트북, 레코더, 이량의 일기 사본, 그리고 그 볼펜 도식이 있는 페이지를 따로 복사한 것. 사다리꼴 위의 접시. 출처 미상. 내일 출처를 찾으러 간다는 예감이 있는데, 예감은 데이터가 아니므로 비고란에만 적는다.
사정 로그 #5
D+203
현장 조사 보고. 대상지: 금산. 수단: 10시 40분발 시외버스, 7번 좌석. 소요: 50분. 날씨: 맑고 추움. 이 항목들을 적는 손이 평소보다 느리다. 이유는 본문에 있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금요일 오전의 금산행 승객은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었고, 평균 연령은 내가 낮추는 쪽이었다. 이량은 이 버스를 마지막 두 달 동안 여덟 번 탔다. 7번 좌석, 창 쪽.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쪽 창을 봤다. 재현 조사의 기본이다. 같은 데이터를 얻으려면 같은 센서를 같은 위치에 둬야 한다.
시 경계를 넘으면 길이 산으로 붙는다. 도로가 두 번 크게 휘고, 세 번째 모퉁이를 돌았을 때, 산자락에 그것들이 나타났다.
접시 안테나들. 산 하나의 남쪽 사면을 차지한 흰 접시들이 전부 하늘의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제일 큰 것은 직경이 수십 미터는 된다. 겨울 산의 갈색 위에서 그것들은 비현실적으로 희고, 비현실적으로 조용했다.
나는 저것들을 안다. 아홉 살 때 처음 봤다. 외할머니 댁이 금산 읍내에서 한참 더 들어가는 마을이었고, 명절마다 형과 나는 이 버스의 전신쯤 되는 완행을 탔다. 창가 자리를 놓고 형과 싸웠고, 대체로 졌고, 그래서 접시들이 나타나는 모퉁이에서는 형의 어깨 너머로 목을 뺐다. 아홉 살의 나는 그것이 하늘의 소리를 받아 적는 기계라고 결론 내렸고, 그 결론을 아무에게도 검증받지 않았다. 마흔여섯의 나는 그것이 위성 지구국의 파라볼라 안테나라는 것을 알고, 상향 주파수 대역과 지향각의 원리도 안다. 아는 것이 늘었는데 설명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오늘 그 모퉁이에서 목을 뺀 것은 아홉 살 쪽이었다.
가방에서 이량의 일기 복사본을 꺼냈다. 마지막 권 후반부, 볼펜 도식. 동심원, 화살표, 사다리꼴 위에 얹힌 접시.
창밖과 대조했다. 출처 확인. 사다리꼴은 안테나의 받침 구조물이고 접시는 접시다. 이량은 이 버스의, 아마도 이 자리에서, 이것들을 보고 그렸다. 일기에 글 대신 그림이 늘어난 시기와 금산행이 시작된 시기를 머릿속에서 겹쳤다. 일치한다. 나는 복사본을 무릎에 놓고 창밖의 원본을 끝까지 봤다. 접시들이 시야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7분쯤 걸렸고, 7분 동안 버스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승객은 나 하나였다. 나머지 여덟 명에게 저것은 풍경이고, 풍경은 데이터가 아니다. 엿새 전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금산 터미널은 작다. 이량의 카드는 언제나 여기서 끊긴다. 도착 이후의 행적은 카드도 통신도 없다. 탐문으로 메꿔야 하는 구간이다. 나는 탐문을 할 줄 안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장통을 도는 일을 18년 했다.
시장 초입의 반찬가게에서 첫 타격이 나왔다. 주인아주머니는 사진을 한 번 보더니 안경을 올렸다. "금요일 새댁이네." 새댁이라는 호칭의 통계적 부정확성은 정정하지 않았다. "꼬박꼬박 왔지. 점심 전에는 저 위를 걸어. 접시 보이는 둘레길. 비 오는 날도 우산 쓰고 걷더라고. 내려와서는 저 골목." 아주머니는 시장 안쪽을 가리켰다. "라디오 고치는 집. 거기 한나절 있다 막차 타고 가."
보험 외판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못 믿는 눈으로 견본 없는 내 가방을 봤다. 탐문의 대가로 멸치볶음을 한 통 샀다. 영수증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량의 금요일이 방금 세 줄로 복원됐다. 둘레길, 라디오 가게, 막차. 6개월간 경찰이 못 만든 동선을 반찬가게가 갖고 있었다. 수사와 생활은 데이터베이스가 다르다.
순서대로 가기로 했다. 이량의 금요일이 둘레길부터라면 나도 둘레길부터다. 시장 뒤로 난 길이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갔다. 30분쯤 걸으니 시야가 열리는 자리가 나왔다. 골짜기 건너편으로 그 접시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 거기에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다. 등받이 페인트가 앉는 자리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한 사람 폭으로, 왼쪽으로 치우쳐서.
이량은 왼손잡이다. 앉을 때 왼쪽으로 붙는 버릇이 있다. 우리 집 소파의 쿠션도 왼쪽이 먼저 꺼졌다. 나는 벤치의 오른쪽에 앉았다. 12월의 나무 벤치는 차갑고, 접시들은 멀리서 흰 등을 보이고 있었고, 골짜기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여기 앉아서 보내는 한 시간을 여덟 번이면 여덟 시간이다. 여덟 시간 동안 이량이 여기서 본 것의 목록을 나는 만들 수 없다. 시야에 잡히는 사물의 목록이라면 5분이면 만든다. 그 둘이 같은 목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나도 안다.
벤치 아래의 흙이 한 자리만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같은 신발이 같은 위치에 여러 번 놓인 자리. 부검 사진을 보듯 그것을 한참 봤다. 동행의 흔적 없음. 한 사람 분의 다짐. 이량은 여기 혼자 왔고, 혼자 앉았고, 늘 같은 자리였다.
골목 안쪽에 가게가 있었다. 간판은 흰 바탕에 파란 페인트 글씨. 금산전파사. 받침 'ㄴ'의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서 멀리서 보면 '금사전파사'로 읽힌다. 유리문 안쪽에 라디오가 쌓여 있었다. 진공관식부터 카세트 겸용까지, 연대순도 크기순도 아닌 어떤 질서로.
문을 열자 종이 아니라 라디오가 울렸다. 문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잡음이 한 번, 쉭, 하고 났다. 작업대 앞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등이 곧고, 손에 인두를 든 채였다. 노인은 나를 한 번 보고, 인두를 거치대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사진은 꺼낼 것 없네. 자네 얼굴에 다 있어."
나는 꺼내려던 손을 멈췄다. "저를 아십니까."
"닮은 사람이 자네 이야기를 했지. 주파수 맞추는 손이 좋은 사람이." 노인은 안쪽의 빈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작업대 옆, 등받이에 방석이 걸린 의자였다. "거기 앉던 사람 남편이면, 거기 앉게."
나는 그 의자에 앉지 않고 옆의 평상에 앉았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언이 첫 판정패였다는 것을 지금 로그를 적으며 인정한다.
노인의 이름은 노자인. 가게는 30년째라고 했다. 나는 신분과 용건을 밝혔다. 손해사정사이고, 김이량의 남편이고, 아내의 실종을 조사하고 있다고. 마지막 동선이 이 가게라고.
"실종이라." 노자인은 그 단어를 라디오 부품처럼 집어 들고 살펴봤다. "찾는 사람이 없어진 게 실종이지. 나는 어디 갔는지 아는데."
심박이 올라갔다. 직업적으로 눌렀다.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지." 노인은 손가락으로 가게 바닥을 가리켰다가, 그 손을 천천히 들어 창밖의 골목과 거리와 산 쪽을 한 바퀴 가리켰다. "다만 자네가 못 볼 뿐이고."
"숨어 있다는 뜻입니까."
"부인은 실종된 게 아닐세." 노자인은 인두 거치대를 바로 놓으며 말했다. "자네 눈이 더 이상 닿지 않는 곳으로, 이사한 걸세."
나는 5초를 기다렸다. 후속 설명은 오지 않았다. 노인은 설명 대신 식은 보리차를 따랐다.
"선생님." 내가 말했다. "측정 가능한 명제로 다시 말씀해 주시죠."
노자인이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로만. "측정이라. 자네 그 말 좋아하는구먼." 그는 작업대 위의 고물 라디오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이놈은 지금 방송이 하나도 안 잡히네. 그럼 방송국이 다 망한 건가, 이놈 코일이 삭은 건가."
"코일이겠죠."
"거 보게. 자네도 알면서." 그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수신기 고장을 송신국 실종으로 적는 사람이 어디 있나."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반박할 명제가 없었다. 명제가 없는 말은 반박이 안 된다. 그게 이 노인의 화법이라는 것을 나는 한 시간쯤 뒤에 파악했는데, 파악이 방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후 내내 나는 질문했고, 노인은 질문으로 답했다. 이량이 여기서 뭘 했느냐고 물으면 "자네 부인이 뭘 하던 사람 같나"가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고 물으면 "마지막이라는 게 어느 쪽 기준인가"가 돌아왔다. 취조의 기본은 상대보다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다. 나는 직업 인생 처음으로 질문 수에서 밀렸다.
다만 한 번, 노인이 묻지 않고 말한 것이 있다. 내가 휴스턴 영상 이야기를 꺼냈을 때다. 4.2초간 흐려지다 사라졌다고 하자, 노자인은 인두 끝을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4.2초면 긴 편이지."
긴 편. 비교급은 표본이 있는 사람의 품사다. 나는 그 두 어절을 수첩에 적었고, 적는 동안 노인은 새 라디오를 작업대에 올렸다. 어디서 그런 표본을 보셨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질문조차 돌아오지 않은 유일한 질문이었다.
막차 시간이 됐다. 일어서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량이 매주 금요일에 여기서 배운 게 뭡니까.
노자인은 가게 안쪽의 그 빈 의자를 한 번 보고, 나를 봤다. "다음 금요일에 오게. 말로 하면 길어."
버스에서 이 로그를 적는다. 어두워진 차창에는 접시들이 안 보이고 내 얼굴이 보인다. 오늘의 수확을 정리한다. 동선 복원: 완료. 종착지: 금산전파사. 신원 확보: 노자인, 추정 70대, 직업 라디오 수리공, 화법 의문문, 보유 정보량 미상이나 하한선이 매우 높음. 미결: 이량이 배운 것. 미결: "4.2초면 긴 편"의 표본 출처. 미결: 빈 의자를 보는 노인의 시선의 의미.
다음 금요일에 다시 온다. 이량의 패턴과 같은 주기다. 재현 조사라고 적어둔다. 적고 보니 이 단어가 오늘 두 번째다. 한 번은 버스에서, 한 번은 지금. 같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쓰이기 시작하면 용어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 오늘은 안 하겠다. 피곤하고, 멸치볶음에서 자꾸 냄새가 난다.
사정 로그 #6
D+210
이번 주의 로그는 길다. 일주일치이고, 일주일 동안 사건이 사건이기를 그만두고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시간순으로 적는다. 결론을 먼저 적지 않는 것은 18년 만에 처음인데, 이번 결론은 맨 끝에 있어야 한다. 읽으면 안다.
월요일. NULL FORUM에 협조 요청 글을 올렸다. 제목: "실종 직전의 음성 기록을 찾습니다 — 분석 절차 공개." 본문에 목적과 방법과 한계를 적고, 원본 파일과 녹음 기기 정보, 유족 동의서를 요건으로 걸었다. 314번 메모의 침묵 구간에서 들은 그 쉭, 소리가 출발점이었다. 마이크 열화로 분류하고 덮었던 비고 한 줄. 휴스턴 영상 이후로 그 한 줄이 자꾸 들춰졌다. 영상에서 카메라는 정직했다. 그렇다면 레코더도 정직했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분석자가 자기 비고란을 의심하는 것은 절차상 문제가 없다. 늦었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수요일까지 파일이 마흔세 개 모였다. 보이스메일, 통화 녹음, 동영상의 소리트랙,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차마 지우지 못한 자동 녹음들. 첨부된 사연은 읽고 나서 별도 폴더에 옮겼다. 분석 중에 사연을 열어두면 귀가 오염된다. 이 문장은 차갑게 읽히겠지만, 마흔세 개의 사연을 한 번에 읽어본 사람은 차갑다는 단어를 쓰지 않을 것이다.
음질 기준을 통과한 것이 열한 개였다. 스펙트로그램을 떴다. 가청 대역 전체를 시간축으로 펼쳐서, 열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 나란히 놓았다.
일곱 장에서 같은 것이 나왔다.
백색잡음이 아니다. 백색잡음은 무작위라서 그림으로 뜨면 균질한 모래밭이다. 이것은 결이 있었다. 넓은 대역에 동시에 걸리면서, 안에 미세한 줄무늬가 서 있는, 모래밭이 아니라 빗질 자국. 일곱 건 모두에서 줄무늬의 간격 구조가 같았다. 소리로 들으면 그냥 쉭, 이다. 그림으로 보면 지문이다. 같은 손가락이 일곱 번 찍혔다.
녹음 기기는 일곱 건 전부 다르다. 휴대폰 세 종, 차량 블랙박스 둘, 유선전화 자동응답기 하나, 캠코더 하나. 기기 결함이라면 기종을 따라가야 한다. 안 따라갔다. 장소도 대륙도 다르다. 공통점은 하나다. 녹음의 주인이 그 직후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여덟 번째. 나는 314번 메모의 침묵 구간을 같은 절차에 넣었다. 결과를 모니터에 띄우고, 일곱 장 옆에 나란히 놓고, 한참 봤다.
같은 빗질. 같은 간격. 같은 지문.
이량의 마지막 1분 49초 속에, 일곱 명의 마지막 순간에 있던 것과 같은 것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절차 외 기록. 그 화면을 띄워놓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두 번. 물은 안 마셨다. 컵을 들었다가 놓는 동작만 했다. 분석자의 신체가 분석을 따라오지 못할 때 하는 의미 없는 워밍업이다. 직업적으로 처음은 아니다. 영아 사망 건 때 그랬다. 그때 이후 처음이다.
목요일에는 검증을 했다. 발견에 들뜬 분석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기 발견을 죽여보는 것이다. 대조군을 만들었다. 실종과 무관한 일상 녹음 2백 개. 내 업무 녹취, 공개된 팟캐스트의 무편집본, 포럼 회원들이 보내준 '아무 일도 없던 날'의 음성메모. 같은 절차, 같은 필터, 같은 눈. 검출 0건. 무작위로 생기는 패턴이라면 2백 개에서 한 번은 나와야 한다. 안 나왔다. 이 패턴은 실종된 사람의 마지막 녹음에서만 나온다. 표본이 작다는 반론은 유효하다. 유효한데, 8 대 0이다.
세부 수치도 적는다. 일곱 건에서 잡음의 지속 시간은 14초에서 31초 사이. 전부 녹음이 끝나기 전에 잦아든다. 나타났다가, 차오르고, 물러간다. 조수(潮水)의 모양이다. 이량의 것만 다르다. 314번의 잡음은 침묵 구간 1분 49초 전체에 낮게 깔려 있다. 제일 길고 제일 잔잔하다. 이 편차의 의미: 미상. 의미를 자꾸 만들고 싶어지는 자리에는 '미상'을 박아두는 게 안전하다.
포럼 공개 여부도 결정했다. 절반만 공개한다.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대조군 결과는 공개, 검출 파라미터는 비공개. 이유: 검출법이 풀리면 다음 날부터 가짜 음원이 쏟아진다. 위조는 수요를 따라온다. 18년간 본 모든 시장이 그랬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 시장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댓글로 항의가 좀 달렸다. 투명성이 어쩌고. 투명성은 내 직업에서 유리창이 아니라 방탄유리 두께의 문제다. 다 보여주되, 깨고 들어오지는 못하게.
다시 절차로. 잡음의 정체에 대한 1차 검토. 전기적 간섭이라기에는 대역이 넓고, 기계적 잡음이라기에는 구조가 섬세하다. 비유하자면 방송국 사이의 빈 주파수에서 나는 소리와 제일 닮았다. 그런데 빈 주파수의 잡음은 우주 배경과 대기와 회로가 만드는 무작위다. 이것은 무작위가 아니다. 무작위가 아닌 잡음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형용모순은 분류가 아니라 명명의 실패다. 명명은 보류한다.
수요일 오후, 금산 도서관에 갔다. 향토자료실에서 군지(郡誌)와 옛 지역 신문 축쇄판을 열람했다. 사서는 향토자료실 이용자가 한 달 만이라며 난방을 따로 틀어줬다. 찾던 것은 위성센터 관련 기록이고, 찾은 것은 준공 기념 특집 지면이다. 단체 사진 캡션에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15년쯤 전의 짧은 동정 기사 하나. "금산위성센터 ○○○ 연구원 정년 퇴임. 30여 년간 지구국 운용에 헌신." 이름 석 자가 노자인이었다. 기사 사진 속 얼굴은 지금보다 살이 있었지만 등이 곧은 것은 같았다.
라디오 수리공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라디오 수리공이기 전에 다른 것이었다는 뜻이다. 평생 위성 신호를 다루던 사람이 퇴임 후에 차린 가게가 고물 라디오 수리점이라는 것. 그리고 "4.2초면 긴 편"이라는 비교급. 점들이 찍히고 있었다. 선은 아직 안 그었다. 선은 본인 앞에서 긋는 게 내 방식이다.
금요일, 금산. 두 번째 방문.
노자인은 지난주와 같은 자리에서 다른 라디오를 고치고 있었다. 나는 인사 대신 노트북을 열고 스펙트로그램 여덟 장을 보여줬다. 그리고 소리를 재생했다. 쉭. 1분 49초짜리 중에서 그 대목만.
노인은 인두를 거치대에 놓았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니터가 아니라 스피커 쪽을 봤다. 소리가 끝날 때까지. 끝나고 나서도 잠깐.
"위성센터에 계셨더군요." 내가 말했다. "30년간 지구국 운용. 퇴임 기사를 찾았습니다."
"군지까지 뒤졌나."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정사라는 직업은 끈질긴 모양이야."
"이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노자인은 대답하지 않고 작업대 서랍에서 작은 드라이버를 꺼내 라디오 뒤판을 열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그가 말했다. "자네는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모릅니다. 아는 것만 말씀드리면, 무작위가 아니고, 기기 결함이 아니고, 실종과 동시에 발생하고, 제 아내의 마지막 녹음에도 있습니다."
"잘 정리했네." 드라이버가 멈췄다. "마지막 항목만 빼고 다 데이터구먼."
"마지막 항목도 데이터입니다."
"그게 데이터면," 노인은 뒤판을 마저 열며 말했다. "자네는 그걸 찾아서, 부인한테 가까워진 것 같나, 멀어진 것 같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까워졌다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입을 연 시점에 이미 그 대답이 참인지 검증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검증 안 된 명제는 발화하지 않는다. 그것도 직업 원칙이다. 원칙이 이렇게 불리하게 작동한 적은 없었다.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밤, 거실에 화이트보드를 세웠다. 지난주에 사다 놓고 베란다에 뉘어 두었던 물건이다. 가로 120센티. 배송 기사가 사무실 이전이냐고 물었던. 거실에 세우니 식탁에서 빈 의자가 안 보이는 각도가 생겼다. 의도한 배치가 아니라고 적고 싶지만, 로그는 정직해야 한다.
보드에 적은 것을 그대로 옮긴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고, 1번 가설이고, 지금부터의 작업 지시서다.
하나. 이것은 실종이 아니다. 실종은 잔여물의 부재인데, 이 현상은 잔여물이 있다. 전파 흔적. 따라서 새 이름이 필요하다. 잠정 명칭: 전이(轉移, Transition).
둘. 전이는 물리 흔적을 남긴다. 물리 흔적이 있다는 것은 물리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셋. 물리 과정이 있다면 메커니즘이 있다.
넷. 메커니즘이 있다면, 재현 가능하다.
다섯. 나는 재현한다. 재현해서, 아내가 간 곳으로 간다.
다섯 줄을 적고 마커 뚜껑을 닫았다. 거실 불을 끄기 전에 한 번 더 읽었다. 논리 구조는 검토를 통과한다. 전제에서 결론까지 비약 없음. 18년간 쓴 보고서 중에 제일 짧고 제일 큰 가설이다.
물론 약점도 적어둬야 공정하다. 보드 오른쪽 아래에 작은 글씨로 반론 두 줄을 달았다. 반론 1: 상관은 인과가 아니다. 잡음이 전이를 만드는지, 전이가 잡음을 만드는지, 제3의 무엇이 둘 다 만드는지 미정. 반론 2: 일곱 명 중 누구도 잡음을 들으려고 듣지 않았다. 재현 조건에 '듣기'가 들어가는지조차 미정. 반론은 실험으로 부순다. 그러라고 있는 게 실험이다.
불을 끄고 나서야 노자인의 질문이 돌아왔다. 가까워진 것 같나, 멀어진 것 같나. 가설 어디에도 그 질문을 넣을 칸이 없었다. 칸이 없는 질문은 보류 폴더로 간다. 보류 폴더의 용량은 오늘도 늘었다. 가설의 다섯 줄에는 빈틈이 없는데, 빈틈없는 가설을 적은 날 밤에 잠이 안 오는 이유에 대해서는, 가설이 없다.
명명(命名)
제네바 — 같은 해 11월
세지 못하는 것은 다스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름이 없는 것은 세지 못한다. 국제 통계 분류 체계의 역사는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씌어 왔다. 사인(死因)에 코드가 부여되고, 질병에 코드가 부여되고, 코드가 부여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인류의 장부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거꾸로 말하면, 코드가 없는 것은 일어나고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니카 헤스가 실무그룹의 자료를 처음 받아 본 것은 그 주였다. 자료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두껍지 않았고, 예상한 것보다 정직했다. 비공개 협의체는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우선 이름을 짓기로 한 참이었다. 그녀는 제네바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명명 회의의 업계 옵서버 자리였다.
11월 둘째 주, 제네바의 한 국제 보건 협의체 별관 회의실에서 비공개 작업반이 소집됐다. 의제는 공문서 기준으로 '원인 불명 인구 소실 현상의 분류 체계 정비'였다. 참석자는 열아홉 명. 역학자 넷, 정신의학자 셋, 인구통계학자 셋, 법의학자 둘, 종교학자 하나, 각국 정부 옵서버 다섯, 그리고 재보험업계 옵서버 하나. 마지막 사람이 헤스였다.
첫날은 숫자가 보고됐다. 마흔 개국 취합 데이터, 마찰 없는 지수 곡선, 연 11.3퍼센트. 헤스의 곡선이었다. 그녀의 슬라이드가 그녀 없이 먼저 와서, 회의실의 공용어가 되어 있었다. 둘째 날은 증언이 보고됐다. 각국에서 수집된 직접 목격 진술 6백여 건의 텍스트 분석 결과가 스크린에 떴다. 언어와 문화와 종교가 다른 목격자들의 진술에서 추출된 공통 술어의 목록은 짧았다. 흐려짐. 밝아짐. 그리고 가장 빈도가 높은 것, 여러 색의 빛이 일렁임.
분석을 맡은 전산언어학 팀은 마지막 항목에 주석을 달았다. 해당 표현은 번역을 거치지 않은 원문 단계에서 이미 수렴함. 포르투갈어의 목격자는 비누방울을, 일본어의 목격자는 기름막을, 한국어의 목격자는 무지개를 말했으나, 지시 대상의 광학적 성질은 동일함. 즉 이것은 은유의 유행이 아니라 현상의 속성으로 판단됨.
헤스는 그 슬라이드를 오래 봤다. 그녀의 곡선과 이 진술들은 같은 사람들의 양면이었다. 그녀가 본 것은 사라지는 점들의 기울기였고, 이 회의실이 보는 것은 사라지기 직전의 얼굴들이었다. 점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정책이 되겠지만, 점이 한때 얼굴이었다는 사실은 어느 모델에도 입력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노트 여백에 적었다.
증언들 중 하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한 유족의 진술이었다.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어머니가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을 매일 같은 시각에 한참 봤다는 것. 가족은 그것을 치매의 전조로 의심해 검사를 받게 했고, 검사 결과는 깨끗했고, 의사는 우울증 약을 권했다고 했다. 헤스는 그 진술 앞에서 자기 포트폴리오의 한 항목을 떠올렸다. 그녀의 회사는 그런 노인들에게 보험을 팔았고, 그들이 사라지면 '시신 부재 실종'으로 분류해 지급을 유보했다. 그녀는 평생 그 유보 건의 적립금을 계산했다. 부엌 창의 빛을 보던 어머니가, 그녀의 스프레드시트에서는 적립률 갱신 대상의 한 행이었다. 회의장에 앉아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직업의 뒷면을 봤다. 그녀가 정확히 가격을 매겨온 그 점들이, 전부 부엌 창의 빛 같은 것을 보던 사람들이었다.
셋째 날, 명칭 분과가 열렸다. 후보는 여덟 개였다. '특발성 인구 소실(IPD)'이 행정적으로 가장 무난했고, '급성 존재 소거 증후군'이 가장 위협적이었으며, 나머지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위원들은 알았다. 이 회의실에서 고르는 단어가 향후 수십 년간 수억 명의 입에서 발음될 것이고, 보험 약관과 사망 신고서와 저녁 뉴스의 자막에 인쇄될 것이다. 이름은 현상의 첫 번째 해석이다. 그리고 대개, 마지막 해석이기도 하다.
발언권을 신청한 것은 종교학자였다. 비교종교학 전공의 노교수는 준비해 온 슬라이드 석 장을 띄웠다. 첫 장은 티베트의 기록이었다. 족첸 전통의 수행자들이 생의 마지막에 도달한다는 경지. 몸이 빛으로 풀려 사라지고 머리카락과 손톱만 남는다는, 천 년에 걸쳐 수백 건이 문서로 남은 전승. 번역된 이름으로, 무지개몸(rainbow body). 둘째 장은 목록이었다. 승천하여 시신이 없는 예언자 엘리야. 육신 그대로 신선이 되어 떠난다는 도교의 우화등선. 시신 없이 빈 무덤만 남은 성인들의 행전. 셋째 장은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현상에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현상의 통계적 급증에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목격담의 무지갯빛과 티베트의 무지개몸을 겹쳐서, 노교수는 말했다. 레인보우 바디 신드롬은 어떻겠습니까. 적어도 이 이름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천 년 치 기록과 함께 보존할 테니까요.
회의실에 처음으로 웃음이 있었고, 웃음이 가라앉은 뒤에 침묵이 있었고, 침묵 끝에 정신의학 분과장이 물었다. "신드롬으로 갑니까, 디스오더로 갑니까." 누군가 답했다. "증후군으로 갑시다. 증후군은 원인을 모른다는 자백의 형식이니까.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 문장이 그 사흘을 통틀어 가장 과학적인 발언이었다는 데에는 이후로도 이견이 없다.
표결은 14 대 5였다. Rainbow Body Syndrome. 약자 RBS. 분류 코드는 잠정 부여, 공표는 무기 연기, 용어는 회원국 행정 문서에 한해 사용. 보도자료는 작성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헤스는 그 종교학자 노교수와 잠깐 복도에 섰다. 그녀는 물었다. 천 년 동안 수백 건이면, 통계적으로는 무시할 수준 아닙니까. 노교수는 커피를 저으며 답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수백 명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전부 그 시대에 가장 깊이 간 사람들이었어요. 스승들. 성인들. 사회의 꼭대기가 아니라, 마음의 꼭대기에 간 사람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달라진 건 숫자가 아니라 문턱입니다. 옛날엔 평생을 바쳐야 닿던 자리에, 요즘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닿아요. 부엌에서, 버스에서, 회사 책상에서. 문턱이 낮아진 겁니다. 왜 낮아졌는지는 나도 모르고요." 헤스는 그 말을 노트에 적지 않았다. 측정할 수 없는 진술은 적지 않는 습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램에서 그 문장이 자꾸 돌아왔다. 문턱이 낮아졌다. 그녀의 곡선이 정확히 그 모양이었다. 배증 기간이 40년에서 6년 반으로 줄어든 곡선. 그것은 사라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그래프가 아니라, 문턱이 낮아지는 그래프였는지도 몰랐다. 같은 데이터, 다른 읽기. 그녀는 그 생각을 일단 닫았다. 너무 멀리 가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깨달음에 질병 코드를 부여했다.
천 년 전 고원의 동굴에서 그것은 수행의 완성이었고 스승의 졸업이었다. 11월의 제네바에서 그것은 잠정 코드와 약자 세 글자가 됐다. 동굴의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 했고, 회의실의 사람들은 그것을 분류했다. 동굴 쪽은 이름이 필요 없었다. 분류하지 않는 자에게 이름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폐회 후, 헤스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노트북을 열고 보고서 초안의 제목란에 새 약자를 입력했다. 변환 사전에 없는 단어라서 자동 교정이 두 번 그것을 지웠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입력했다. 단어는 그렇게 사전에 들어간다. 누군가가 자동 교정에 두 번 이기면 된다.
같은 주, 그 약자는 열일곱 개 언어의 행정 문서에 처음으로 인쇄됐다. 이름이 생긴 날, 현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같은 속도로 계속 사라졌다. 변한 것은 하나다. 이제 인류는 그것을 서류에 적을 수 있다. 서류에 적을 수 있는 것은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감각의 이름은 안심이고, 안심의 분류 코드는 아직 없다.
헤스는 그날 밤 취리히로 돌아왔다. 실무그룹의 정식 위촉장이 메일함에 와 있었다. 직함은 '인구연속성 실무그룹 정책모델 자문위원'. 그녀는 위촉장을 출력해 코르크보드의 곡선 옆에 핀으로 꽂았다. 곡선과 직함이 나란히 걸렸다. 한쪽은 사람들이 떠나는 속도였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늦추는 일에 그녀가 서명했다는 증서였다. 두 종이 사이의 거리는 30센티미터였고, 그 거리가 앞으로 몇 년을 결정할 것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잠들기 전에 RBS라는 세 글자를 다시 떠올렸다. 무지개. 목격자들이 본 그 일렁임. 그녀는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의 하늘에는 곡선만 있었다. 상승 곡선, 하강 곡선, 신뢰 구간. 빛이 물방울을 통과하며 갈라지는 단순한 광학 현상을,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약속이라 불렀고 깨달음이라 불렀고 이제 증후군이라 불렀다. 이름이 셋 다 같은 것을 가리켰다. 다만 부르는 사람의 밀도가 달랐을 뿐이다. 그녀는 자기가 어느 밀도에서 그 단어를 발음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잠정 코드와 적립금의 밀도. 그것이 그녀가 선 자리였고, 당분간 그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실험 로그 #01–#04
D+225
로그의 이름을 바꿨다. 사정 로그는 끝났다. 사정은 일어난 일의 분류이고, 지금부터 하는 것은 일어날 일의 제조다. 실험 로그. 양식도 바꿨다. 가설, 방법, 결과, 판정. 네 칸이면 된다. 회사에는 무급 휴직을 냈다. 사유란에는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었다. 따지고 보면 정확한 기재다. 내 일신(一身)이 문제다. 이 몸이 여기 있다는 것.
데이터셋부터 만들었다. NULL FORUM에서 추린 기록 충분 사례 37건. 사회경제 변수로는 아무것도 안 나온다. 소득, 학력, 종교, 혼인 상태, 전부 무상관. 떠나는 데에 자격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자격 조건이 없다는 것은 매뉴얼도 없다는 뜻이라서, 좋은 소식의 형태를 한 나쁜 소식이다. 행동 변수에서는 네 개가 나왔다. A. 단독 반복 행위(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 일). B. 특정 장소의 반복 방문. C. 사물에 대한 관찰 기록. D. 행복도 상승, 37건 전부. 이량은 넷 다 해당한다. 37건 위에 이량을 겹치면 윤곽선이 거의 일치한다. 아내는 표준적인 전이 경로를 밟았다. 표준적. 이 단어를 적는 데 시간이 걸렸다.
여기까지가 관찰이다. 지금부터 개입이다. 변수를 하나씩 분리해서 투입한다. 변인 통제. 과학의 기본이고, 내가 가진 유일한 종교다.
실험 #1. 가설: 변수 A의 핵심이 정신 비우기라면 명상이 최단 경로다. 방법: 좌식 명상 6시간, 무아 시도. 결과: 무아 도달 0회. 획득: 다리 저림 2회, 저녁 메뉴 고민 3회(김치찌개로 수렴), 그리고 '내가 지금 무아에 도달했나'를 점검하는 자아의 활동량 증가. 판정: 기각. 비고: 무아를 시도하는 주체가 나라는 구조적 결함. 자아로 자아를 끄는 스위치는 시중에 없다.
실험 #2. 가설: 핵심이 감각 차단이라면 차단실이 경로다. 방법: 암막, 귀마개, 빈방, 6시간. 결과: 2시간 41분에 중단. 무가 오지 않고 부재가 왔다. 어둠 속에서 뇌는 비는 게 아니라 재고 조사를 시작한다. 6개월 치 재고를 다 꺼내 보였다. 판정: 기각. 비고: 차단실에서 나와 집 안의 불을 전부 켰다. 화장실까지. 데이터가 아니지만 기록한다.
실험 #3. 가설: 핵심이 반복 보행이라면 이량의 코스가 경로다. 방법: 금산 둘레길, 하루 5왕복, 이틀. 결과: 31킬로미터, 종아리 근육통, 전이 징후 0. 판정: 기각. 비고: 5왕복째에 알았다. 이량은 왕복하지 않았다. 닳은 자리는 한 곳이다. 이량은 걷기 위해 걸은 게 아니라 거기 앉기 위해 걸었다. 실험 설계가 데이터를 오독했다.
실험 #4. 가설: 핵심이 관찰 기록이라면 이량의 메모 방식이 경로다. 방법: 사물을 정하고 음성메모. 결과 샘플을 그대로 옮긴다. "콩나물시루를 15분 봤다. 콩나물이었다." "보일러 배관 소리를 들었다. 보일러 소리였다." 이량의 메모에서 콩나물은 자라고 배관은 말을 거는데, 내 메모에서 사물들은 신원 확인만 당하고 끝난다. 판정: 기각.
중간 결산. 4전 4패. 위어식으로 적자면, 나는 지금 우주에서 가장 데이터가 풍부한 실패자다. 그런데 이상한 항목이 하나 있다. 실패가 쌓이는 동안 이량의 기록이 점점 읽힌다. 명상에 실패해보니 이량이 명상을 한 적이 없다는 게 보이고, 차단실에서 나와보니 이량이 아무것도 차단하지 않았다는 게 보인다. 이량은 끄지 않았다. 켜는 쪽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번의 실패가 전부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분리하고, 통제하고, 투입한다. 나는 그 자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면 실험이 멈추기 때문이다. 비고에 적고 별표를 쳤다. 실험을 멈추게 하는 종류의 의심은, 보류한다.
그달 말, 통제하지 못한 변수가 집에 왔다. 조카 진주. 형의 딸, 열일곱. 학교를 자주 빠지고, 상담 선생이 '주의 산만'과 '현실감 저하' 사이의 단어를 썼고, 형은 야단을 치고, 진주는 입을 닫았다고 했다. 형수가 전화로 며칠 맡아달라고 했다. 형이 직접 안 하고 형수가 전화한 시점에서 가정의 역학이 다 읽혔지만, 분석은 접어두고 그러라고 했다.
진주는 거실에 들어서서 화이트보드를 봤다. 다섯 줄 가설과 맨 위의 "종은 어떻게 우는가", 8건의 스펙트로그램, 37건 요약표. 6개월 치 작업이 벽 한 면에 걸려 있었다. 어른들은 이걸 보면 대체로 말을 잃거나 화제를 돌린다. 진주는 한참 보더니 말했다.
"삼촌, 이거 시험공부처럼 하고 있네."
"무슨 뜻이야."
"외운 단어로는 시 못 쓰잖아요."
나는 라면 물을 올리려던 참이었다. 냄비를 든 채로 멈췄다. 그 문장을 분해해보려 했는데 분해가 안 됐다. 분해가 안 되는 문장은 둘 중 하나다. 헛소리거나, 너무 압축돼서 풀면 길어지는 것이거나. "단어를 많이 외우면 시를 더 잘 쓰지 않나." 약한 반박인 걸 알면서 했다. "단어 많이 아는 사람이 시 잘 쓰면, 사전이 제일 잘 쓰게요." 진주는 신발을 정리하며 말했다. 나를 이기려는 말투가 아니었다. 당연한 걸 말하는 말투였다. 그게 더 졌다.
라면을 먹으며 진주가 보드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 다 행복해서 간 거죠." 변수 D를 말하는 거였다. "어떻게 알았어." "표정 보면 알아요. 다 그 표정이야." "무슨 표정인데." 진주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깐 생각했다. "음. 다음 약속이 없는 사람 표정." 그러고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더 물으면 "그냥 알아요"가 나올 거라는 걸, 나는 이미 노자인에게서 배웠다.
그날 밤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주가 이상한 소리 하거든 받아주지 말라고. 단호하게 끊어줘야 한다고, 안 그러면 더 깊이 빠진다고. 형의 목소리에는 6개월 전 내 목소리가 있었다. 이량을 우울로 분류하던 그 목소리. 모르는 것을 빨리 아는 칸에 집어넣어 안심하려는 사람의 목소리. "형, 안 보인다는 거랑 없다는 건 달라. 우리가 못 보는 게 한두 개냐." 형은 대답 없이 끊었다.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반박할 말이 없을 때 우리 형제가 하는 행동이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다.
진주가 자고 간 다음 날 아침, 식탁에 두 사람 몫의 밥이 있었다. 6개월간 식탁에는 늘 한 사람 몫이었다. 마주 보는 빈 의자 하나. 그런데 진주가 앉으니, 이량의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는데도 비어 있음이 외롭지 않았다. 채우지 않고도 외롭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걸, 진주가 라면을 먹는 걸 보며 알았다. 비운 채로 옆에 있어 주는 것.
로그에 진주의 발언 두 건을 적고, 둘 다 반증 불가능이라고 분류했다. 검증할 측정 기준이 없다. 그런데 기각도 안 된다. 기각하려면 반대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6개월간 내가 모은 모든 증거가 오히려 저 발언 쪽에 줄을 서고 있다.
마지막으로 협상 기록. 다음 단계 실험에는 장비가 필요하다. 신호 발생기, 광대역 수신기, 차폐 부품. 금산전파사에는 위성센터 30년의 흔적이 서랍마다 들어 있다. 노자인에게 장비와 작업 공간을 빌려달라고 했다. 노인은 인두를 든 채로 조건을 하나 걸었다.
"금요일 오전엔 수리 일을 배우게. 실험은 오후에 하고."
"제 실험에 수리 기술은 필요 없습니다."
"내 가게엔 필요하네. 장비 임자 일을 돕는 게 임대료지."
임대료의 논리 구조는 반박 불가였다. 노인은 계약 성립 기념이라며 고장 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하나 내밀었다. 첫 교재라고 했다. 뒤판을 열자 화석이 된 건전지가 나왔다. 누액으로 단자가 초록색이 된. "수리의 절반은 청소일세." 면봉과 식초로 40분 단자를 닦자 라디오에서 소리가 났다. 지역 방송의 정오 뉴스. 40분짜리 노동의 대차대조표: 비용 40분, 수익 라디오 소리 하나. 손익 판정은 보류한다. 보류가 늘어나는 추세선에 대해서도 보류한다.
합류
바젤 — 같은 해 12월
음모론은 그림자 정부를 상상한다. 선글라스, 지하 벙커, 세계를 조종하는 소수. 그런 것은 없었다. 인구연속성 실무그룹의 사무국은 바젤의 한 금융기구 별관 4층에 있었고, 회의는 분기마다 열렸으며, 회의록은 작성됐고, 보고서는 공개됐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었다. 다만 아무도 읽지 않았다. 그것이 이 기구의 유일한 보안이었다. 가장 잘 숨는 방법은 잠그는 것이 아니라, 밝은 곳에서 지루해지는 것이다.
모니카 헤스가 첫 회의에 참석한 날, 음모론자들은 인터넷에서 '비밀 인구통제 카르텔'을 폭로하는 중이었다. 화살표와 빨간 실로 이어진 도표, 익명의 내부 고발자, 곧 닥칠 거대한 음모. 헤스는 그 게시물 중 하나를 읽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게시물이 묘사한 음모는 회의장의 실제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진짜는 늘 더 지루하다. 그리고 지루함만큼 완벽한 위장은 없다. 음모론이 큰 소리로 떠드는 동안, 공개된 회의록 위로 아무 눈도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를 가려준다고, 사무국의 한 직원이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가 돈 한 푼 안 쓰는 홍보팀이지요.
첫날 헤스가 받은 것은 출입증과 두꺼운 자료철이었다. 자료철의 표지에는 일련번호와 함께 '공개'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그 도장을 한참 봤다. 안의 내용은 마흔 개국의 전이율 추정, 개입 시나리오, 비용 모델이었다. 한 나라가 무너지는 속도와 그것을 늦추는 비용이 표로 정리돼 있었고, 그 표는 공개돼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열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작년 한 해 열람 신청은 두 건이었다. 한 건은 박사 논문을 쓰는 학생이었고, 다른 한 건은 자료를 음모의 증거로 인용하려던 블로거였다. 학생의 논문은 심사에서 떨어졌고, 블로거의 글은 같은 진영 안에서도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로 묻혔다. 진실은 거기, 밝은 곳에, 일련번호와 도장과 함께 놓여 있었고, 아무도 그 의미를 읽지 못했다. 읽으려면 곡선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곡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됐고, 그중 절반은 이 별관 4층에서 일했다. 비밀은 잠가서 지키는 게 아니라, 읽을 사람이 없어서 지켜진다. 그림자란 은폐가 아니라 불가시성이었다. 밝은 데 있는데 보는 눈이 없어서 그림자였다.
기구를 이끄는 사람은 레나테 폴이었다. 중앙은행에서 30년을 일하고 통화정책 위기를 세 번 넘긴 사람. 그녀는 악당이 아니었다. 회의장에서 가장 진심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떠나는 사람을 막으려는 게 아닙니다." 폴이 헤스에게 말했다. "막을 수 없다는 건 압니다. 우리가 늦추려는 건 속도예요. 한 세대에 30퍼센트가 떠나면 사회는 충격을 흡수합니다. 같은 30퍼센트가 5년에 떠나면 연금이 무너지고, 병원이 비고, 전력망을 돌릴 사람이 없어집니다. 남겨질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어둠 속에서 굶게 됩니다." 폴은 손을 모았다. "우리는 떠나는 자들의 적이 아니에요. 남는 자들의 변호인입니다."
헤스는 그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없어서 동의했다. 그녀의 곡선은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두 배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 곡선은, 어느 지점에서 시스템의 흡수 능력을 추월한다. 그 추월 지점을 뒤로 미루는 일은, 수학적으로, 옳았다. 그녀는 평생 옳은 수학 편에 서 왔다.
위촉을 수락하기 전, 그녀는 단 하나를 물었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이 일이 해가 되는가. 폴은 정직하게 답했다. "그들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는 그들을 조금 더 늦게, 어쩌면 조금 덜 가볍게 떠나게 만들 테니까. 하지만 헤스 박사님, 윤리는 산수예요. 한 사람의 늦춰진 평온과, 수십억의 무너지지 않은 삶을 저울에 올리면, 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공리주의의 가장 깨끗한 형태였고, 깨끗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헤스는 그 산수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며, 마음 한구석에 작은 비고를 달았다. 저울의 한쪽에 올린 '한 사람'이 익명일 때만 이 산수가 성립한다는 것. 그 한 사람에게 이름과 얼굴이 생기면, 산수는 무너진다는 것. 그녀는 그 비고를 1년 동안 잊고 지냈다. 안톤 베르거에게 이름과 얼굴이 있다는 것을, 그가 그녀의 저울 위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회의장에 모두가 폴 같지는 않았다. 안보 부처에서 온 옵서버 하나는 떠나는 인구를 '전략 자산의 유출'이라는 표현으로 불렀고, 그에게 이 일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국력 보존이었다. 그는 곡선을 막는 일과 곡선을 숨기는 일을 같은 문장 안에서 말했다. 또 다른 몇은 기구의 존속 자체가 목적이 된 관료들이었다. 위기가 없으면 부서도 없으므로, 위기는 늘 적당히 유지되어야 했다. 진심인 자, 권력을 지키려는 자, 부서를 지키려는 자. 같은 책상에 셋이 앉아 같은 보고서에 서명했고, 서명은 구분되지 않았다.
헤스는 첫 분기 동안 그 셋을 구분하는 법을 익혔다. 진심인 자는 회의가 끝나도 자료를 들고 갔다. 권력을 지키려는 자는 결론보다 책임 소재를 먼저 물었다. 부서를 지키려는 자는 위기가 해소될 기미가 보이면 불안해했다. 셋은 같은 정책을 지지하면서 셋 다 다른 것을 원했다. 폴은 세계를 원했고, 포겔은 우위를 원했고, 관료들은 다음 분기를 원했다. 이 동상이몽이 기구를 굴러가게 하는 연료였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는 조직은 곧 멈추지만, 각자 다른 것을 원하면서 같은 서류에 서명하는 조직은 오래간다. 헤스는 그것을 부패가 아니라 구조로 봤다. 부패는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은 교체할 수 있지만, 구조는 교체할 수 없다. 그녀가 맞서고 있는 것은 악인이 아니라 구조였고, 구조에는 설득할 얼굴이 없었다.
그리고 안톤 베르거가 있었다. 알프스 리에서 정년을 두 번 미룬 그 노모델러가, 이 기구의 비상근 자문이었다. 헤스를 추천한 것도 그였다. "내가 자네를 끌어들였군." 첫 회의가 끝나고 베르거가 말했다. 미안한 기색은 아니었다. "여기 사람들은 자기들이 강을 막는 둑이라고 믿어. 폴은 진심이고, 진심인 게 더 위험하지. 나는 자네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곡선을 정직하게 보는 사람이라서 불렀어. 이 방에 그런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거든." 그는 안경을 닦았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정직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막아."
베르거와 헤스는 그 겨울 자주 같은 자료를 봤다. 그는 인구통계를 40년 했고 그녀는 보험 모델을 15년 했으므로, 두 사람의 숫자는 출처가 달랐지만 같은 곳을 가리켰다. 그들은 점심을 같이 먹지 않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데이터 앞에서 오래 침묵하는 방식이 닮았다. 한번은 베르거가 자기 책상의 오래된 인구 피라미드 그림을 가리켰다.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건강한 사회의 표준 형태. "내가 입사할 때 세상은 이렇게 생겼었어. 지금은……" 그는 최근 데이터로 그린 형태를 띄웠다. 중간이 패고 있었다. 노인도 아이도 아닌,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들이 빠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늙어 죽는 걸로 인구가 준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지금 빠지는 건 가장 건강하고 가장 평온해진 사람들이야. 통계가 거꾸로 섰어. 나는 평생 이 그림을 읽었는데, 이젠 이 그림이 나를 읽는 것 같군." 헤스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나중에, 그가 자기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헤스에게 떨어진 첫 과제는 명료했다. 곡선의 기울기를 늦출 정책 수단을 모델링하라. 어떤 개입이 이탈률을 몇 퍼센트 낮추는가. 비용 대비 효과는 어떤가. 그녀는 그 일을 좋아했다. 막연한 공포를 변수로 바꾸는 일이었으니까. 공포는 다룰 수 없지만 변수는 다룰 수 있다. 그녀는 모델에 첫 정책 레버를 입력했다. 경제적 인센티브. 남는 사람에게 보상하고 떠나는 비용을 높이면, 한계선상의 사람들이 머무를 것이다. 시장은 늘 그렇게 작동했다.
첫 모델을 그룹에 발표하던 날, 회의장은 그녀가 본 어떤 학회보다 조용했다. 열두 명이 둘러앉았고 통역 부스가 셋이었다. 그녀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슬라이드로 띄웠다. 인센티브 강도별 이탈률 억제 곡선, 비용 대비 효과, 재정 소요.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어느 소득 구간에 집중할 것인가. 정치적 수용성은. 국가 간 형평은. 전부 좋은 질문이었고, 전부 그녀의 모델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회의실의 누구도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 그들을 머무르게 하는가. 그 질문은 모두가 답을 두려워해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 헤스는 자기도 묻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그녀는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정교하게 답했고, '효과가 있는가'는 가정으로 두었다. 가장 중요한 변수를 상수로 놓는 것, 그것이 모든 정교한 오류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폴은 발표가 끝나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드디어 우리에게 도구가 생겼군요." 도구. 헤스는 그 단어를 좋아했다. 도구는 휘두르는 사람의 책임을 가볍게 한다.
모델을 처음 돌린 밤, 그녀는 코르크보드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곡선과 위촉장이 30센티미터 거리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곡선의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다. 재는 사람은 늘 바깥에 선다. 재는 행위가 그녀를 곡선에서 분리해 준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막으려는 손도 그 곡선의 한 점이라는 것을. 둑을 쌓는 일이 강을 인정하는 가장 격렬한 방식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델 결과 파일을 저장하고 이름을 붙였다. INTERVENTION_v1. 버전 번호를 붙이는 습관은, 다음 버전이 있으리라는 예감의 형식이다. 그녀는 v1을 붙이며, 이것이 마지막 버전이기를 바랐다. 한 번에 맞는 모델은 좋은 모델이다. 그러나 그녀의 경험상, v1으로 끝난 모델은 한 번도 없었다.
실험 로그 #05
D+233
전파 가설은 내 가설 중에 제일 깨끗했다. 깨끗한 가설은 검증도 깨끗하게 끝난다. 끝나는 방향이 어느 쪽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가설을 다시 적는다. 8건의 마지막 녹음에서 동일 지문의 광대역 노이즈가 검출됐다. 노이즈는 전이의 흔적이다(앞서 내린 결론). 흔적이 원인의 일부라면, 그 신호에 노출되는 것으로 전이가 유도된다. 검증 방법은 단순하다. 노이즈를 재생해서, 듣는다. 변수가 아니라 흔적 자체를 몸에 투입한다.
장소는 금산전파사 안쪽 방. 노자인이 창고로 쓰던 두 평짜리 방을 비워줬다. 벽 한 면이 옛날 흡음재로 덮여 있었다. 위성센터 시절 누군가 측정실로 쓰던 자재를 떼어다 붙인 거라고 했다. 측정실.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노인을 봤고, 노인은 자기 작업대로 돌아갔다. 묻지 않은 질문이 또 하나 적립됐다.
장비 구성을 적는다. 노자인의 신호 발생기는 내 나이보다 오래된 물건인데 교정 상태가 완벽했다. 다이얼에 연필로 미세 보정값이 적혀 있었다. 30년간 한 사람이 같은 손으로 적은 숫자들이다. 광대역 출력이 가능했고, 8건의 노이즈를 디지털로 복원해 아날로그 경로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재생 대역은 검출된 그대로. 음압 스피커와 안테나 양쪽으로, 즉 귀로 듣는 경로와 몸이 쬐는 경로를 동시에 열었다.
실험 #5-A. 음압 재생. 8건의 노이즈를 차례로, 그다음 합성본을 한 시간. 결과: 청취 피로, 약한 두통. 전이 징후 0.
실험 #5-B. 전파 조사(照射). 안테나로 같은 신호를 몸에 쬐며 한 시간. 노자인이 출력을 안전 범위로 제한했다. "사람 굽는 실험은 안 빌려주네." 결과: 무(無). 계측기에는 신호가 잡히는데 몸에는 아무 일도 없다.
실험 #5-C. 동시 노출. 귀와 몸에 동시에, 두 시간. 중간에 조명을 껐다. 깜빡임 목격담의 '무지갯빛'을 유도하려면 시각 자극을 통제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결과: 어둠 속에서 노이즈를 두 시간 들었다. 그게 결과의 전부다. 무지개 0건. 일렁임 0건. 획득: 노이즈를 두 시간 들으면 그 소리가 귀에 눌어붙어서, 집에 와서 냉장고 소리에도 같은 패턴이 들린다는 것. 이건 전이가 아니라 청각 잔상이다. 판정: 기각.
대조 실험도 했다. 분석자가 자기 결과를 믿으려면 안 믿어보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8건 노이즈 대신 백색잡음을, 같은 음량, 같은 시간. 결과는 5-A와 구분되지 않았다. 두통의 양까지 비슷했다. 즉 내 몸은 전이의 지문과 그냥 잡음을 구별하지 못한다. 8건의 지문이 스펙트로그램에서는 또렷한데 인체 반응에서는 백색잡음과 동급이라는 것. 계기에는 보이고 몸에는 안 보이는 신호. 이 비대칭을 어느 칸에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비고에 통째로 적었다.
포럼의 자원자 셋이 같은 실험을 자기 환경에서 재현했다. 장비도 대역도 제각각이었지만 결과는 4 대 0으로 같았다. 무. 전이 유도법 정리본을 믿던 회원들이 댓글에서 조용해졌다. 한 명은 "그래도 음량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했다. 음량으로 안 되는 걸 음량으로 의심하는 건, 안 되는 열쇠를 더 세게 돌리는 일이다. 자물쇠가 문제가 아니라 열쇠가 틀린 거라고 답을 달다가 지웠다. 내 열쇠도 틀렸는데 남의 열쇠를 평할 자격이 없다.
세 실험을 종합한 판정: 전파 가설 기각. 노이즈는 전이를 유도하지 않는다.
기각의 무게가 다른 기각들과 다르다. 명상이나 둘레길은 내 솜씨가 부족해서 진 거라고 우길 여지라도 있었다. 이건 흔적 자체를 직격으로 투입했는데 안 됐다. 가장 강한 패였고 가장 깨끗하게 졌다.
노자인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할 의무는 없는데, 장비 임자에게 임대물의 사용 결과를 알리는 건 도리라고 적어둔다. 실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문장은 단서 조항으로 단다.
"안 됩니다." 내가 말했다. "흔적을 그대로 재생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노자인은 마침 진공관 하나를 불빛에 비춰보던 중이었다. 필라멘트가 끊겼는지 보는 거였다. "녹음된 종소리로는," 그가 진공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종이 울리지 않지."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는 지금 녹음을 크게 트는 중일세. 종소리를 아무리 크게 틀어도, 그건 종이 울린 적이 있다는 증거지, 종이 우는 건 아니야."
나는 그 비유를 분해했다. 종소리(노이즈)는 종이 울린 결과(전이)의 기록이다. 결과의 기록을 재생한다고 결과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흔적과 원인을 혼동했다는 지적이다. 내가 보드 구석에 작게 적어둔 반론 1, 상관은 인과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적어둔 반론에 내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그럼 종은 어떻게 웁니까." 내가 물었다.
노자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의 멀쩡한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돌려 방송국과 방송국 사이의 빈 곳에 맞췄다. 쉭, 하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내가 8건에서 검출한 그 소리와 사촌쯤 되는, 채널 사이의 잡음.
"이게 뭔지 아나." 노인이 물었다.
"빈 주파수 잡음입니다. 우주 배경하고 대기하고 회로가 만드는 무작위."
"그렇게 배웠겠지." 노인은 다이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나는 30년간 이 소리를 들었네. 접시로, 자네 귀보다 훨씬 큰 귀로. 그러다 어느 날 알았어. 이 소리 중에 일부는 무작위가 아니라는 걸. 무작위인 척하는 거지. 너무 멀리서 와서, 우리 계기에는 무작위로밖에 안 잡히는 것들이 있어."
설교의 냄새가 났다. 나는 직업적으로 끊었다. "측정 가능한 명제로 말씀하시면, 그건 신호 대 잡음비 문제입니다. 약한 신호는 잡음에 묻힙니다. 새로운 얘기 아닙니다."
"맞네." 노인은 순순히 물러섰다. 너무 순순해서 이긴 기분이 안 들었다. "자네 말이 다 맞아. 그래서 자네는 그 소리를 더 크게 틀고, 더 정밀하게 재고, 더 많이 모으겠지.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다이얼을 아주 천천히 돌렸다. 잡음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 소리는 더 잡음 같아질 걸세. 자네가 키우는 건 신호가 아니라 잡음이거든."
그 문장을 받아 적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서가 아니라, 알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아서였다. 측정할수록 멀어진다는 말로 들렸다. 그런 명제는 내 직업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직업에서는 측정할수록 가까워진다. 그게 측정의 정의다. 정의에 반하는 명제는 거짓이거나, 아니면 측정 바깥의 무언가에 관한 명제다. 둘 중 어느 쪽인지 판정이 안 됐다.
로그에 적는다.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없는데 화가 났다. 화가 난 이유를 분석하면 이렇다. 노인의 말이 틀렸다면 화가 안 났을 것이다. 화가 났다는 것은 일부 맞다는 신체 신호다. 나는 내 분노를 데이터로 읽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메타-관찰이 건강한 건지는 모르겠다.
집에 와서 화이트보드의 가설 다섯 줄을 다시 봤다. 둘째 줄과 셋째 줄 사이에 균열이 있었다. "전이는 물리 흔적을 남긴다"에서 "물리 과정이 있다"로 넘어가는 자리. 흔적이 있다고 과정이 재현 가능한 건 아니다. 화산재가 있다고 화산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흔적은 사건이 지나간 자리지, 사건을 부르는 주문이 아니다.
그래도 줄을 지우지는 않았다. 한 번의 기각으로 가설을 버리는 건 한 번의 성공으로 가설을 믿는 것만큼 게으르다. 전파 경로는 닫는다. 다른 경로를 연다. 변수 A, B, C, D 중에 아직 안 건드린 게 있다. 그리고 노인의 종 비유에는 후속 질문이 달려 있다. 종은 어떻게 우는가. 답을 안 주고 갔지만, 답이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실험을 정리하다가 한 가지가 걸렸다. 8건의 노이즈는 전부 '실종 직후'에 잦아든다고 그때 적었다.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정확히는, 녹음이 끝나기 직전에 잦아든다. 노이즈가 멈춰서 전이가 끝난 게 아니라, 기록이 끝나서 노이즈가 안 잡히는 것일 수도 있다. 종이 다 울려서 조용한 건지, 녹음기를 꺼서 조용한 건지, 기록만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이 구분 불가능성을 비고에 적어두는데, 적으면서 등이 서늘했다. 언젠가 다시 볼 항목이라는 예감. 예감은 데이터가 아니므로 별표만 친다.
견습 항목 기록. 오늘 두 번째 교재는 다이오드 식별이었다. 색 띠를 읽는 법. 노인이 말했다. "급할 것 없네. 색은 도망 안 가." 나는 색 띠 네 개의 순서를 외우려고 머릿속에 표를 만들었고, 노인은 외우지 말고 자꾸 보라고 했다. "외운 색하고 본 색은 달라." 어디서 들은 말 같았다. 출처가 인출되지 않았다. 보류 폴더에 넣는다. 요즘 보류 폴더에는 노인의 말이 제일 많이 쌓인다.
잠들기 전에 이량의 314번 메모를 다시 켰다. 실험 결과를 들은 귀로 들으니 다르게 들렸다. 침묵 구간에 깔린 그 노이즈는, 이량이 튼 게 아니다. 이량은 그냥 거기 앉아 있었고, 노이즈가 이량 쪽에서 났다. 송신기를 끼고 앉은 게 아니라면, 이량이 노이즈를 들은 게 아니라 이량이 노이즈의 출처였다는 뜻이 된다. 종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우는 종이 되어가는 중이었다는 뜻. 이 해석은 너무 멀리 갔다. 데이터가 허락하는 거리를 넘었다. 그래서 보류 폴더에도 안 넣고, 그냥 한 번 듣고 껐다. 그런데 끄고 나서도 그 문장이 안 꺼졌다.
다음 실험 미정. 처음으로 다음 실험을 예고하지 못하고 로그를 닫는다. 예고할 실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고하기 전에 생각할 게 생겨서다. 종은 어떻게 우는가. 이 질문을 보드 맨 위에 적었다. 가설보다 위에.
기각, 기각
취리히 — 이듬해 1월에서 3월
INTERVENTION_v1은 경제적 인센티브 모델이었다. 가정은 단순하고 견고했다. 사람은 비용에 반응한다. 떠나는 비용을 높이고 남는 보상을 키우면, 한계선상의 사람들이 머무른다. 헤스는 이탈 직전 인구의 재무 데이터에 모델을 입혔다. 세제 혜택, 잔류 연금 가산, 지역 공동체 보조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곡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긴 했다. 떠나는 사람들의 재산 처분 속도가 느려졌다. 그들은 보조금을 받았고, 세제 혜택을 챙겼고, 서류를 정리했고, 그리고 떠났다. 인센티브는 그들이 떠나는 방식을 바꿨을 뿐 떠나는지 여부를 바꾸지 못했다. 헤스는 결과를 세 번 재검했다. 변수가 틀린 게 아니었다. 가정이 틀렸다. 이 사람들은 비용에 반응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비용은 무게의 언어인데, 그들은 무게를 내려놓는 중이었다. 무게를 내려놓는 사람에게 무게를 더 얹어 붙잡으려는 모델은, 처음부터 단위가 맞지 않았다.
판정: 기각. 그녀는 파일 이름을 바꿨다. INTERVENTION_v2.
v2는 공동체 결속 모델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유대가 강한 사람은 떠나기 어렵다. 가설은 데이터로 뒷받침됐다. 1인 가구의 이탈률이 다인 가구보다 높았으니까. 그래서 그룹은 한 도시에서 공동체 강화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했다. 이웃 결연, 세대 통합 행사, 소속감 제고. 6개월 뒤 데이터가 왔다. 프로그램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사람들의 이탈률이,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았다. 헤스는 그 역설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답은 결국 단순했다. 유대를 강화하려는 행사가, 사람들에게 유대를 더 또렷이 보게 했고, 또렷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가벼운지도 보았다. 묶으려는 손길이 풀어야 할 매듭을 가리켰다. 판정: 기각. 그 시범 도시의 담당자가 보낸 후기 한 줄이 보고서에 붙어 있었다. "행사에 가장 열심이던 주민회장이 지난달 떠났습니다. 마지막 모임에서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없었어요." 헤스는 그 한 줄을 오래 봤다. 결속을 만들려던 행사가, 가장 결속된 사람을 가장 환하게 떠나보냈다. 모임은 사람들에게 서로를 보게 했고, 서로를 본 사람은 그 연결이 얼마나 가볍게 들 수 있는 것인지도 보았다. 매듭을 보여주면 풀고 싶어진다. 그녀는 그 인과를 모델에 넣을 방법을 찾다가 포기했다. 개입의 강도가 클수록 효과가 마이너스로 가는 항을, 어떤 정책 입안자도 사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v3은 의미 치료였다.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과도한 평온'이라면, 삶에 새로운 긴장과 목표를 주입하면 그 평온이 흐트러질 것이다. 야심을 자극하고, 미래 계획을 세우게 하고, 결핍을 환기한다. 시범 집단에서 일부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들은 다시 바빠졌고, 다시 원했고, 다시 닻을 내렸다. 그러나 추적 결과, 그 닻은 그들을 머무르게 한 게 아니라 불행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떠나지 않은 그들은 떠난 사람들보다 우울 지표가 높았다. 그룹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그 대가로 그들을 덜 행복하게 만들었다. 폴은 그 보고서를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우리가 구하려는 게……" 그녀는 문장을 끝맺지 않았다. 판정: 기각.
세 번의 기각에는 공통의 형태가 있었다. 헤스는 그것을 도표로 그려봤다. 가로축에 개입의 강도, 세로축에 이탈률. 직관적으로는 우하향 곡선이어야 했다. 더 세게 막을수록 덜 떠나야 한다. 실제 데이터는 평평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위로 꺾였다. 일정 강도를 넘는 개입은 이탈률을 도로 높였다. 그녀는 그 변곡점에 이름을 붙이려다 그만뒀다. 이름을 붙이면 다룰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룰 수 없다는 게 데이터의 말이었으니까. 그녀는 평생 변수를 분리하고 통제하고 투입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 현상은 분리하면 사라지고 통제하면 가속하고 투입하면 튕겨 나왔다. 통제 가능한 세계에서만 통하는 도구를, 통제 불가능한 현상에 휘두르고 있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 모든 게 못으로 보이는데, 이건 못이 아니라 물이었다.
세 번의 기각이 쌓이는 동안, 세계의 다른 쪽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실패가 있었다.
콜로라도 산중의 한 공동체. 그들은 자신들을 '먼저 가는 사람들'이라 불렀고, 외부는 승천파라 불렀다. 설립자는 신경과학 박사였고, 이 사실이 중요하다. 승천파는 미신이 아니라 과학의 언어로 무장한 운동이었고, 바로 그래서 위험했다. 그들은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 행적을 역설계해 '전이 프로토콜'을 만들었다. 단독 수행, 감각 차단, 소유의 포기, 그리고 무엇보다 강도. 더 깊이, 더 길게, 더 비우라. 가입자는 전 재산을 헌납했다. 떠날 사람에게 재산은 무게이고, 무게에 대한 집착이 전이를 막는 닻이므로, 헌납은 수행의 일부였다. 틀린 전제 위에 세운 정연한 논리는, 엉성한 논리보다 멀리 데려간다. 벼랑까지.
겨울의 어느 밤, 그들은 집단 전이를 시도했다. 단식 9일째, 영하의 산중 시설에서 난방을 껐다. 열기마저 감각 입력이고 입력은 닻이므로. 마흔한 명이 빈방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아침에 일곱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일곱 구의 몸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저체온과 탈수. 시신이 남았다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을 말했다. 진짜 전이는 시신을 남기지 않는다. 일곱 구는 일곱 장의 실패 증명서였다.
헤스는 그 사건 보고서를 그룹 자료로 받았다. 언론은 사이비의 비극이라는 익숙한 서랍에 넣고 닫았지만, 그녀는 닫지 못했다. 그녀가 본 것은 사이비가 아니라 방법론이었다. 승천파는 사라진 사람들을 정확히 관찰했다. 단독 수행, 감각의 단순화, 소유의 가벼워짐 — 데이터는 옳았다. 그들이 틀린 것은 단 하나, 동사였다. 그들은 그것을 '해야 하는 일'로 읽었다. 더 세게 하면 더 빨리 도달하는 목표로. 그러나 곡선 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세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게 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이었다. 승천파는 비움을 향해 전력 질주했고, 전력 질주는 비움의 반대다. 가속 페달을 밟아 정지에 도달하려 한 셈이다. 더 세게 밟을수록 더 멀어지는 정지.
헤스는 자기 모델 세 개와 콜로라도의 시신 일곱 구를 같은 책상에 놓았다. 그녀는 측정과 인센티브로 사람을 멈춰 세우려다 세 번 실패했고, 승천파는 강도와 노력으로 사람을 밀어내려다 일곱을 죽였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벽은 같았다. 막으려는 쪽도 가속하려는 쪽도, 둘 다 그것을 '하는 일'로 다뤘다. 그것은 하는 일이 아니었다. 폐쇄된 시설의 빈방 벽에, 누군가 매직으로 적어둔 문장이 보고서 사진에 찍혀 있었다. 문법이 틀린 한 줄. "닿으려 하지 말고 닿여라." 틀린 문법으로, 그들이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승천파의 데이터를 분석하며 헤스가 가장 오래 본 것은 헌납 기록이었다. 가입자들은 전 재산을 내놓았다. 집, 연금, 자식에게 물려줄 것까지. 외부에서는 그것을 세뇌의 증거로 읽었지만, 헤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가벼워지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가벼움을 연기하려고 그런 거였다. 진짜로 가벼워진 사람은 재산을 '내놓지' 않는다. 그냥 신경 쓰지 않게 될 뿐이다. 내놓는 행위에는 여전히 무게에 대한 의식이 있다. 무게를 의식하며 무게를 버리는 일, 그 자체가 가장 무거운 닻이었다. 승천파는 비움을 가장 격렬하게 수행함으로써, 비움에서 가장 멀어졌다. 헤스는 그것을 자기 모델과 나란히 놓고 한참 봤다. 그녀의 모델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막으려고 가장 정교하게 측정함으로써, 막을 수 없는 것에서 가장 멀어지는 자리.
그날 밤 헤스는 그룹 리스크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이 현상의 가장 큰 위험은 현상 자체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INTERVENTION 폴더의 v4를 새로 열었다. 빈 파일이었다. 한참을 빈 파일 앞에 앉아 있었다. v4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그녀는 처음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막는 모델은 v1, v2, v3에서 전부 기각됐고, 기각의 이유가 매번 같았다. 막으려는 행위가 막으려는 것을 키웠다. 그렇다면 v4는 막지 않는 모델이어야 하는데, 막지 않는 정책이라는 것은 형용모순이었다. 그녀는 빈 파일을 저장하지 않고 닫았다. 저장할 내용이 없었다.
실험 로그 #09
D+251
실험 #08은 기록만 남긴다(가설: 변수 C, 사진 촬영. 결과: 사물 사진 200장, 전부 신원 확인 사진. 기각). 실험 #09는 길다. 설계가 길고, 실행이 길고, 끝이 없다. 끝이 없는 게 이번 실험의 특징이자 결함이다.
가설을 새로 세웠다. 그동안의 실험은 변수를 하나씩 분리해서 투입했다. 전부 실패했다. 분리가 문제일 수 있다. 이량은 변수를 따로따로 한 게 아니라, 2년에 걸쳐 통째로 살았다. 그렇다면 통째로 재연한다. 변수 분리가 아니라 전체 복기. 방법: 이량의 마지막 2년을 일 단위로 복원해서, 같은 날 같은 일을 한다. 일종의 전기적(傳記的) 재연이다.
데이터는 충분하다. 일기 2년분, 음성메모 314개, 카드 명세, 위치 기록. 이량의 하루를 거의 분 단위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스프레드시트로 만들었다. 날짜, 시각, 행위, 장소, 비고. 2년 치. 행이 7천 개가 넘었다. 7천 개의 행으로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것. 이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직업적으로는 자랑스럽고 인간적으로는 끔찍하다. 두 감정을 같은 칸에 적을 수 없어서 칸을 둘로 나눴다.
재연을 시작했다. 이량의 금요일부터.
이량의 금요일은 이렇다. 7시 기상. 8시 20분 집 출발. 9시 10분 대전복합터미널. 10시 40분 금산행. 11시 30분 금산 도착. 점심 전 둘레길, 그 벤치, 한 시간. 점심은 시장에서 혼자. 오후는 전파사. 막차로 귀가. 나는 이 일정을 그대로 밟았다. 8주간.
처음 몇 주는 데이터 수집이었다. 이량이 앉던 벤치에 앉아 이량이 본 각도로 안테나를 봤다. 이량이 먹던 시장 국숫집에서 같은 국수를 먹었다. 주인이 물었다. "댁도 그 새댁처럼 혼자 드시네." 그 한 마디가 이번 주 가장 큰 데이터였다. 이량도 혼자 먹었다. 매주, 혼자. 나는 그걸 외로움으로 분류하려다 멈췄다. 이량의 음성메모 어디에도 외롭다는 말이 없다. 분류 보류.
날씨를 맞추는 게 어려웠다. 이량의 어느 금요일은 비였고, 어느 금요일은 첫눈이었다. 나는 같은 날짜에 갔지만 1년 차이라 날씨가 달랐다. 재연의 한계다. 같은 길, 같은 시각은 복제할 수 있어도 같은 하늘은 복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량의 일기를 보면, 이량은 날씨를 통제하려 한 적이 없다. 비 오면 비를 적고, 눈 오면 눈을 적었다. "비 오는 날의 접시는 더 조용하다. 비를 맞으면서도 소리를 안 낸다." 나는 맑은 날의 접시밖에 못 봤다. 통제하려는 자에게는 변수가 결함이고, 맞이하는 자에게는 변수가 그냥 그날이다. 이 차이를 적고 별표를 쳤다. 변수 통제가 내 종교라고 전에 적었는데, 이량은 그 종교의 신자가 아니었다.
전파사에서 노자인은 이량이 배우던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량이 매주 금요일 오후에 배운 것은, 진공관 라디오 수리였다. 그냥 라디오가 아니라 진공관식. 트랜지스터 이전의, 관(管) 안에서 전자가 달리는 방식의 라디오.
노자인이 첫 시간에 한 말. "부인은 진공관을 좋아했네. 트랜지스터는 너무 빠르다고. 진공관은 켜고 나서 소리가 나오기까지 좀 기다려야 하거든. 데워질 시간이 필요해. 부인은 그 기다리는 시간을 좋아했어."
나는 진공관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노자인 말대로, 바로 소리가 안 났다. 관이 데워지는 동안, 아무 소리도 없는 십몇 초가 있었다. 죽은 것 같은 침묵. 그리고 관이 주황색으로 달아오르면서, 소리가, 멀리서 다가오듯, 천천히 차올랐다. 그 십몇 초를 이량은 매주 기다렸다는 것이다.
노자인은 이량의 작업 노트를 줬다. 가게에 두고 간 거라고 했다. 손바닥만 한 수첩에, 회로도와 부품값과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글씨가 익숙했다. 18년간 식탁에, 냉장고에, 메모지에 붙어 있던 글씨. 그 글씨로 진공관 핀 배열이 적혀 있었다. 6핀, 7핀. 히터 전압. 그리고 한 페이지 구석에 회로와 무관한 한 줄. "고치는 게 아니라, 듣는 거였다. 노인 말이 맞다." 무엇이 맞다는 건지 앞뒤가 없다. 나는 그 한 줄 앞에서 한참 있었고, 회로도는 더 안 봤다.
견습은 계속됐다. 노자인의 수업은 설명이 없다. 보여주고, 시키고, 틀리면 어디가 틀렸는지 묻는다. "여기 납이 왜 안 붙나." 인두 온도가 낮아서요. "그건 결과고." 음. 인두를 안 데웠어요. "그건 원인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참 뒤에 알았다. 마음이 급해서 데워지기 전에 갖다 댄 거였다. 진공관도 사람도, 데워질 시간을 안 주면 붙지 않는다. 노자인은 그 말을 안 했다. 내가 적었다. 적고 나서, 이게 이량의 수첩 속 한 줄과 같은 말이라는 걸 알았다.
이량이 마지막으로 만진 라디오가 가게에 남아 있었다. 노자인이 작업대 아래 칸에서 꺼냈다. 1960년대 국산 진공관 라디오. 이량이 한 달 넘게 붙잡고 있었는데 끝내 못 고쳤다고 했다. "거의 다 됐는데, 마지막 하나를 안 했어." 어디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노자인은 처음으로 직답에 가까운 말을 했다. "안 고친 게 아니라, 안 고치고 떠난 거지. 다 고치면 더 올 일이 없으니까." 나는 그 라디오를 받아 왔다. 비고: 임의 반출 아님, 노자인 허락. 진짜 비고: 받아 올 때 손이 조금 떨렸다.
314번 메모의 침묵 1분 49초가 떠올랐다. 그건 진공관이 데워지는 시간의 긴 버전 같았다. 이 연상은 비고에 적었다. 측정 불가. 그래도 적었다.
행정 사항 하나를 끼워 넣는다. 실험 로그를 NULL FORUM에 연재하던 게 화근이었다. 검증을 받으려고 올린 절차가, 절차만 떼어져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설과 기각은 떨어져 나가고 방법만 남았다. 명상 6시간, 차단실, 둘레길 5왕복. 기각된 실험의 방법이 '전이 유도 프로토콜'이라는 제목으로 팔리고 있었다. 포럼은 둘로 갈렸다. 내 로그를 경전 삼는 재현파와, 전부 사기라는 냉소파. 재현파 일부는 유료 강좌를 열었고 전이 유도 굿즈를 팔았다. 향초, 차단 안대, 명상 음원. 냉소파는 그들을 조롱하는 콘텐츠로 조회수를 벌었다. 양쪽 다 돈이 됐다. 사라진 사람들이 시장이 됐다. 나는 정정 댓글을 달았다. 그건 유도법이 아니라 비유도 확인서라고. 댓글 조회수는 굿즈 판매 페이지의 40분의 1이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데이터의 요약본은 한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싸울 적대자가 없다는 것을. 누가 악의로 이러는 게 아니다. 슬픔도 진실도 일단 시장에 들어오면 상품이 되는, 그 구조가 작동할 뿐이다. 적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였고, 구조에는 멱살을 잡을 얼굴이 없다.
여기서부터 실험이 이상해졌다. 보고한다.
재연을 거듭할수록, 데이터가 이량으로 안 읽히고 이량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냐면. 처음에 일기는 분석 대상이었다. 7천 개의 행 중 하나. 그런데 같은 길을 같은 요일에 여덟 번 걷고 나니, 일기의 문장들이 정보가 아니라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은행나무가 다 노래졌다. 나무는 절차가 빠르다." 이 문장을 데이터로 읽으면 11월 둘째 주 단풍 관측 기록이다. 그 벤치에 여덟 번 앉고 나서 읽으면, 이량이 내 옆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이량을 재현하려고 이량의 길을 걸었다. 이량은 재현되지 않았다. 대신 이량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18년을 같이 산 사람을, 사라지고 나서, 그 사람의 길을 걸으면서, 처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건 실험 목적이 아니다. 부산물이다. 그런데 부산물이 본체보다 커지고 있다.
음성메모의 호칭 문제도 풀렸다. 314개 메모 중 61개에 나오는 "우주 씨". 나는 그게 혼잣말 속 습관적 호명이라고 분류했었다. 8주째 금요일 밤, 막차에서 메모를 듣다가 알았다. 혼잣말이 아니었다. 이량은 청자를 알고 말한 거였다. 이 메모를 언젠가 내가 들을 것을 알고. 314개는 일기가 아니라 편지였다. 수신인은 처음부터 나였다. "우주 씨는 지금쯤 현장이겠다"는, 현장에 있는 나에게 한 말이었다. 6개월간, 아니 메모가 시작된 2년 전부터, 이량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나는 그걸 듣는 데 2년하고도 251일이 걸렸다.
이 사실을 알아낸 순간을 정확히 적는다. 막차는 시 경계의 그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어두워서 안테나는 안 보였다. 나는 이어폰으로 메모를 듣고 있었고, 버스에는 나 말고 두 명이 있었고, 나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손등으로 입을 막는 동작을 했고, 그게 전부였다. 18년차 손해사정사가 막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다. 옆자리의 승객은 졸고 있었다. 데이터로서 기록할 것은 없다. 그냥 모퉁이를 돌았고, 버스는 계속 갔다.
집에 와서 이량의 라디오를 작업대에 올렸다. 노자인 말대로 거의 다 돼 있었다. 회로를 따라가 보니 마지막 한 곳, 출력단의 콘덴서 하나가 교체 대기 상태였다. 새 부품도 옆에 준비돼 있었다. 이량이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두고 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갈아 끼울 수 있었다. 인두는 데워져 있었고, 부품은 거기 있었고, 핀 배열은 수첩에 있었다.
갈지 않았다. 갈면 라디오가 고쳐지고, 고쳐지면 이량이 한 달간 매주 와서 들여다본 이유가 끝난다. 노자인의 말이 그제야 분해됐다. 다 고치면 더 올 일이 없다. 이량은 라디오를 고치러 온 게 아니라, 고치지 않으려고 온 거였다. 끝내지 않는 일만이 매주 금요일을 만든다. 목적이 있는 일은 목적에 도달하면 끝나고, 끝나는 일은 사람을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한다.
나는 콘덴서를 갈지 않고 라디오를 덮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실험 로그에 적으면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안 하는 것을 결과 칸에 적었다. 18년간 내 결과 칸에는 늘 한 일이 적혔다. 오늘은 안 한 일이 적혔다.
로그 결론. 실험 #09는 가설 검증에 실패했다. 이량의 경로를 통째로 재연해도 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각.
그러나 기각 칸 옆에 새 칸을 만들어야 했다. 칸 이름: 부산물. 내용: 실패하는 동안 아내를 이해했다. 이것을 실험 결과로 인정해야 하는가. 과학적으로는 아니다. 이건 측정 가능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 8주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고, 변화의 원인은 이 실험이고, 원인이 결과를 낳았으면 그건 결과다.
보드 맨 위의 질문에 한 줄을 더 단다. "재현하려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같은 행위인가, 반대 행위인가." 노자인에게 이 질문을 가져가면 또 질문으로 돌려줄 것이다. 그래도 가져갈 것이다. 요즘은 답보다 질문이 돌아오는 게 덜 외롭다. 이 문장은 로그에 부적합하다. 그래도 남긴다. 로그는 정직해야 한다. 8주 동안 이 문장 하나가 제일 정직하다.
둑을 쌓는 사람들
바젤 — 같은 해 봄
부드러운 모델이 전부 기각되자, 그룹의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회의의 언어가 바뀌었다. 인센티브, 결속, 의미 같은 단어가 줄고, 식별, 차단, 관리 같은 단어가 늘었다. 부드러운 손이 안 되면 단단한 손을 쓴다. 그것이 둑을 쌓는 사람들의 다음 단계였고, 인류가 통제 불능 앞에서 늘 밟는 순서였다. 인정은 공짜인데 시도는 비싸고, 권력은 무능을 인정하느니 파산을 택한다.
레나테 폴이 그 전환을 이끌었다. 그녀는 악당이 되지 않았다. 더 진심이 됐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요." 폴이 회의에서 말했다. "부드러운 방법은 6년을 벌어줍니다. 6년으로는 부족해요. 우리에겐 한 세대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책상에는 손주 사진이 있었다. 헤스는 그 사진을 본 뒤로 폴을 미워할 수 없게 됐다. 폴이 구하려는 것은 추상적 수십억이 아니라 그 사진 속 아이가 자랄 세계였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선인이다. 사랑은 못 할 일이 없게 만든다.
한번 폴이 헤스에게 손주 이야기를 했다. 다섯 살이라고 했다. 아이가 요즘 그림을 그리는데, 자꾸 사람이 없는 도시를 그린다고. 빈 건물, 빈 거리, 불 꺼진 창. 어디서 봤느냐고 물으면 "그냥 그려져요"라고 한다고. 폴은 그 말을 하며 처음으로 모델러가 아니라 할머니의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애가 사람이 가득한 도시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게 이기적인가요?" 헤스는 아니라고 했다.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폴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폴이 옳은데도, 폴이 옳은 방식으로 하는 모든 일이 정반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선의가 곡선을 위로 밀었다. 그게 이 일의 가장 잔인한 점이었다. 악의라면 멈추라고 말할 수 있다. 선의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헤스는 알지 못했다.
포겔은 다른 방식으로 위험했다. 그는 떠나는 사람들을 한 번도 사람으로 부르지 않았다. 유출, 누수, 자산. 그의 언어에서 인간은 이미 숫자였고, 숫자는 통제의 대상이었다. 어느 회의에서 그는 위험군 식별의 정확도를 자랑하며 그래프를 띄웠다. 그래프는 정말로 정확했다. 떠날 사람을 90퍼센트 넘게 맞혔다. 헤스는 그 정확도가 자랑이 아니라 고발이라는 걸 그만 알았다. 떠날 사람을 그렇게 정확히 맞힌다는 것은, 떠나는 데에 분명한 신호가 있다는 뜻이고, 그 신호가 전부 '더 건강해지고 더 평온해진' 방향이라는 뜻이었다. 포겔의 시스템은 사실상 행복 탐지기였다. 행복해지기 시작한 사람을 90퍼센트 정확도로 찾아내, 그 행복을 중단시키는 기계.
안보 부처에서 온 옵서버 포겔은 다른 종류였다. 그에게 곡선은 위협이었고, 위협은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 위험군을 사전 식별하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단독 반복 행위, 특정 장소 회귀, 소비 감소, 사회적 이탈 — 떠나기 직전의 행동 징후를 빅데이터로 탐지해 '위험군'을 미리 찾아내고 개입한다. "떠날 것 같은 사람을 미리 찾아 상담과 재연결을 투입하는 겁니다." 포겔이 말했다. 선의로 포장된 문장이었다. 포장을 벗기면 이렇다. 행복해지기 시작한 사람을 국가가 추적해 멈춰 세운다. 헤스에게 그 탐지 모델의 설계가 맡겨졌다. 그녀는 떠나는 사람들의 데이터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그 결정이 내려진 회의를 헤스는 오래 기억했다. 부드러운 모델의 기각 보고가 끝나자, 포겔이 일어나 한 장의 슬라이드를 띄웠다. 위험군 사전 식별 시스템의 개념도. 화살표가 데이터에서 개인으로, 개인에서 개입으로 흘렀다. 회의실은 잠깐 조용했다. 누군가 윤리위원회 검토를 언급했고, 포겔은 "위기에는 평시의 절차를 적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 문장은 역사상 모든 비상조치가 자신을 정당화한 문장이었고, 그래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폴은 한참 침묵하다 승인했다. 승인하며 그녀가 한 말은 "최소한으로"였다. 최소한으로. 모든 통제는 최소한으로 시작해서 최대한으로 끝난다. 헤스는 회의록에 자기 이름이 설계 담당으로 적히는 것을 봤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논거가 없었다. 데이터는 그녀 편이 아니라 포겔 편이었다. 식별은 정확할 것이고, 정확한 식별은 유용해 보일 것이다. 그녀가 가진 거부의 이유는 데이터가 아니라 예감뿐이었고, 그녀는 평생 예감을 근거로 채택하지 않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일을 시작했고,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손이 멈칫했다. 그녀가 만들 모델은 떠나는 사람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건 세 번의 기각으로 증명됐다. 막지 못한다면, 이 모델이 실제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가벼워지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 순간에 무게를 도로 얹는 일. 그녀의 모델은 전이를 멈추는 도구가 아니라, 각성을 지연시키는 도구였다.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난다. 다만 이 모델은 그들이 조금 더 늦게, 조금 덜 행복하게 떠나도록 만들 것이다. 시간을 버는 일의 진짜 단위는 연(年)이 아니라, 누군가의 미뤄진 평온이었다.
그 무렵 안톤 베르거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했다. 회의에서 그의 발언이 줄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이건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하고 싶지 않은 침묵. 그는 창가 자리를 좋아하게 됐고, 발표 중에 창밖을 오래 봤다. 점심을 혼자 먹기 시작했고, 늘 차던 손목시계를 어느 날부터 안 찼다. 헤스가 시계 이야기를 묻자 그는 잠깐 웃었다. "시간을 자꾸 안 보게 되더군. 봐도 그게 별로 안 중요해져서." 그는 자기 데이터셋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배에게 인수인계하듯, 천천히, 빠짐없이. 한번은 헤스가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가 창가에 서서 길 건너 공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었다. 십 분쯤 그러고 있었다. 무엇을 보느냐고 묻자 그는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잎이 흔들리는 걸 보고 있어. 어제도 봤는데 오늘도 다르게 흔들리는군. 평생 이런 걸 본 적이 없어. 나는 나무를 목재 공급량으로만 봤거든." 그는 그제야 돌아봤다. "모니카, 내가 미친 것 같나?" 헤스는 자기 모델의 진단 기준을 떠올렸다. 단독 반복 행위, 사물에 대한 과도한 주의, 사회적 활동 감소. 임상적으로 그는 모든 기준을 충족했다. 의학은 그를 환자라 부를 것이고, 포겔의 시스템은 그를 위험군이라 부를 것이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그 한 마디가 그녀가 그룹의 진단 기준을 처음으로 부정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기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조금 놀랐다.
헤스는 그 변화의 목록을 머릿속에서 자기 모델의 변수와 대조했다. 단독 행위 증가. 소비 단순화. 분쟁 기록 소멸. 과도한 평온. 그녀가 매일 코딩하는 그 징후들이, 한 층 위 동료에게서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그녀가 설계 중인 탐지 모델이 가장 먼저 가리킬 사람이, 그 모델을 만들라고 그녀를 불러들인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하면 포겔의 시스템이 안톤을 '위험군'으로 분류할 것이고, 상담과 약물과 재연결이 투입될 것이다. 막지도 못하면서, 그의 마지막 평온만 헝클어뜨릴 것이다. 헤스는 처음으로 데이터를 숨겼다. 18년 경력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데이터를 숨기는 일을 평생 가장 큰 직업적 죄악으로 여겼다. 모델러의 정직은 불편한 데이터를 그대로 보고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직이 곧 누군가의 마지막 평온을 빼앗는 신고가 됐다. 정직과 잔인이 같은 행동이 되는 순간, 그녀의 직업윤리는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그녀는 베르거의 변수들을 자기 노트에만 적고, 그룹 시스템에는 올리지 않았다. 올리지 않은 칸을 볼 때마다 손이 잠깐 멈췄다. 숨긴 데이터 한 줄의 무게가, 그녀가 평생 보고한 어떤 데이터보다 무거웠다. 그녀는 그 무게로, 자기가 어느새 곡선의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바깥에 선 관찰자는 데이터를 숨길 이유가 없다. 숨긴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편이 됐다는 뜻이고, 편이 든 사람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다.
"자네 모델이 나를 잘 잡아낼 거야." 어느 저녁 베르거가 먼저 말했다. 헤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투였다. "잡아내서 어쩌려고? 나를 다시 무겁게 만들려고? 다시 시계를 차게 하고, 다시 시간을 보게 하고, 다시 회의에 끼워 넣으려고?" 그는 안경을 닦았다. "나는 평생 인구를 셌어. 사람을 수로 바꾸는 일. 그게 직업이었지. 그런데 요즘은 창밖의 나무 한 그루가 자꾸 인구 전체보다 커 보여. 이게 병이면 자네 모델이 고쳐주겠지. 그런데 모니카, 이건 병이 아니야. 나는 평생 처음으로 안 아파."
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모델에는 그 진술을 넣을 칸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탐지 모델의 진행을 멈췄다. 멈춘 이유를 보고서에는 '검증 데이터 부족'이라고 적었다. 진짜 이유는 칸이 없어서 못 적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를, 만들던 손을 멈추고 나서야 보기 시작했다. 둑을 쌓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둑이 막으려는 것이 강이 아니라 사람의 졸업이라는 것을, 그 봄에 처음으로 의심했다.
실험 로그 #11
D+270
강 팀장이 대전에 왔다. 정확히는 내 집에 왔다. 공무원이 민간인 집에 사적으로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흔하지 않은 행동은 흔하지 않은 사유를 갖는다. 사유는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USB 하나.
그는 거실에 들어와 화이트보드를 봤다. 강 팀장도 데이터를 보는 사람이라, 보드를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다섯 줄 가설, 맨 위의 질문 세 개, 8건 스펙트로그램, 37건 표. 다 읽고 나서 그가 한 말. "사정사님은 저보다 멀리 와 계시네요." 멀리. 방향이 있는 단어다. 어느 쪽으로 멀리인지는 그도 나도 말하지 않았다.
USB를 줬다. 주면서 그는 처음으로 행정 문어체를 안 썼다. "이거, 받은 적 없는 걸로 해주세요. 저도 드린 적 없고." 그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내용은 두 종류예요. 절망하실 거 하나, 더 절망하실 거 하나."
내용을 본 보고를 한다.
첫 번째 폴더. 정부의 '전이 유도 연구'. 강 팀장이 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만 알던 것을, 어떤 경로로 사본을 확보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그를 보호한다. 폴더 안에는 수십 년 치 연구 기록이 있었다. 국가가, 국가 자원으로, 전이를 인공적으로 유도하려 한 기록.
읽으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내 실험 로그였다. 규모만 국가급인. 명상 유도 — 대규모 피험자, 통제된 환경, 뇌파 모니터링. 기각. 전자기 자극 — 내가 한 걸 천 배 예산으로. 기각. 약물 — 세로토닌 계열, 해리성 약물, 환각제. 일부 피험자가 '무지갯빛'을 보고했으나 전이 0. 기각. 감각 차단 — 군용 시설 규모. 기각. 사회적 고립 유도, 종교적 몰입 유도, 심지어 임사 체험 유도까지. 전부, 전부 기각.
국가가 수십 년, 수천억을 써서 도달한 결론이 내 거실 화이트보드의 결론과 같았다. 재현 불가. 나는 혼자 6개월 만에 도달했고 국가는 떼로 수십 년 걸렸다는 게 유일한 차이인데, 그건 위로가 안 된다. 같은 벽에 머리를 박은 사람이 나 말고도 국가 단위로 있었다는 것. 벽이 진짜라는 뜻이다. 내 솜씨 문제가 아니라.
기록 하나가 특히 걸렸다. '차폐 도시' 항목. 전이를 유도하는 게 안 되면, 거꾸로 막는 건 되는지 본 실험이다. 전자기 차폐 환경에서 피험자 집단을 장기 거주시키고 전이율을 관찰. 결과란에 적힌 한 줄: "유의미한 차이 없음. 단, 피험자 전반의 우울 및 불안 지표 상승." 막는 것도 안 됐는데, 막으려는 시도가 사람을 병들게는 했다. 유도도 차단도 안 되고, 손대는 것마다 부작용만 남는다. 의학에서 이런 물질을 뭐라 부르는지 안다. 손대면 안 되는 것.
연구진의 마지막 종합 소견도 옮겨둔다. 익명 처리된 한 연구원의 메모가 부록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20년간 '어떻게 유도하는가'를 물었다. 질문이 틀렸을 가능성을 한 번도 검토하지 않았다. 유도되지 않는 현상을 유도하려는 예산은,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불안을 위한 것이었다." 이 메모는 채택되지 않았다. 채택됐으면 부록이 아니라 결론에 있었을 것이다. 국가도 자기 비고란을 본문으로 못 올린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강 팀장이 말한 '절망하실 거 하나'가 이거였다. 국가도 못 한다. 재현이라는 동사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이, 이제 표본 국가 단위로 보강됐다.
두 번째 폴더가 '더 절망하실 거'였다. 폴더 이름은 날짜와 코드뿐이었다. 30년 전 날짜. 그 안에 보고서 한 건. 발신 기관: 금산위성센터. 부서명: 특수신호분석실.
특수신호분석실. 노자인이 흘린 '측정실'이라는 단어가 여기 있었다. 보고서 내용은 광대역 노이즈 추적 기록이었다. 30년 전, 위성센터의 한 부서가 출처 불명의 광대역 노이즈를 포착했고, 그것을 추적했고, 추적 과정이 기록돼 있었다. 내가 8건에서 검출한 그 지문과 같은 종류의 노이즈를, 30년 전에 누군가 접시 안테나로, 나보다 훨씬 큰 귀로 쫓고 있었다.
보고서는 미완이었다. 중간에 끊겨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결론란이 비어 있고, 그 아래 작성자 서명란에 이름이 있었다.
노자인.
나는 그 이름을 한참 봤다. 모니터 밝기를 낮췄다가 다시 올렸다. 글자는 안 변했다. 30년 전, 노자인은 이 노이즈를 추적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보고서를 끝맺지 못했다. 결론란이 비어 있다. 끝맺지 못한 게 아니라, 끝맺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 그 비고가 회수된다. "긴 편이지." 노자인은 깜빡임의 지속 시간을 비교급으로 말했다. 표본이 있는 사람의 품사. 30년 전 그 부서에서, 노자인은 깜빡임의 표본을 봤다. 누구의 표본인지는 보고서에 없다. 없는 게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보고서를 끝까지 읽었다. 문체가 익숙해서 두 번 읽었다. 측정값을 먼저 적고 해석을 나중에 다는 방식. 가설을 세우고 반증을 시도하는 구조. 노이즈의 대역과 지속 시간을 소수점까지 적어둔 집착. 내 실험 로그와 같은 문법이었다. 30년 전의 노자인은 지금의 나처럼 썼다. 측정의 인간이었다. 노이즈를 쫓고, 재고, 분류하려 한 인간. 그러다 결론란 앞에서 멈췄다.
멈춘 자리가 중요하다. 보고서의 마지막 측정 기록 다음, 결론을 적어야 할 칸이 비어 있다. 그 직전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거였다. "추적 대상이 관측 범위를 벗어남. 사유: 미상. 추적자 본인의 관측 조건에 변화가 감지됨." 추적자 본인의 관측 조건에 변화. 행정 문서의 건조한 어휘로 적힌, 자기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보고. 노자인은 노이즈를 쫓다가, 자기가 쫓기는 쪽이 됐다는 걸 적고, 거기서 펜을 놨다. 언젠가 그가 한 말. "나는 30년간 이 소리를 들었네. 그러다 어느 날 알았어." 어느 날 안 것의 날짜가, 이 비어 있는 결론란의 날짜다.
이 발견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오늘의 진짜 문제다. 데이터로는 충분하다. 노자인은 30년 전 이 노이즈를 추적했고, 무언가를 봤고, 보고서를 못 끝냈고, 퇴임 후 라디오 수리점을 차렸고, 거기서 이량을 만났다. 점들이 선이 된다. 선이 가리키는 건 하나다. 노자인은 답을 알거나, 적어도 나보다 30년 먼저 이 벽 앞에 섰던 사람이다.
직업 본능은 들이대라고 한다. 증거를 내밀고, 결론란이 왜 비어 있는지 추궁하고, 30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받아내라고. 18년간 그렇게 자백을 받았다. 증거를 테이블에 놓으면 사람은 말한다.
그런데 노자인은 자백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30년간 그 결론란을 비워둔 사람이다. 비워두는 것을 선택한 사람에게 증거를 들이대면, 그는 결론란을 더 단단히 비울 것이다. 직업 본능이 처음으로 틀린 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치를 들면 다 못으로 보이는데, 이건 못이 아닐 수 있다.
강 팀장은 가기 전에 화이트보드를 한 번 더 봤다. "사정사님." 그가 말했다. "저는 그 숫자를 5년 봤고, 사정사님은 반년 봤는데, 왜 사정사님이 더 멀리 왔을까요." 나는 답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도 답을 알고 물은 거였다. 그에게는 따라갈 사람이 없고, 나에게는 있다. 데이터를 보는 동기가 통계와 아내는 다르다. 그는 직업으로 봤고 나는 따라가려고 봤다. 같은 숫자도 따라갈 사람이 있으면 더 멀리 데려간다. 이건 위로도 자랑도 아니다. 그냥 변수의 차이다.
USB를 돌려주려 했더니 강 팀장이 안 받았다. "복사본이에요. 원본은 제가 위험한 데 안 둡니다." 그는 신발을 신으며 마지막 말을 했다. "그리고 사정사님. 첫 번째 폴더 말인데요. 그거 다 실패 기록인데, 저는 그게 왜 희망처럼 읽힐까요." 나는 그 문장을 잡았다. 국가가 강제로 못 여는 문이라는 건, 강제로 여는 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통제로 안 되는 것은 통제 밖에 답이 있다. 강 팀장은 행정의 인간인데 행정의 한계를 희망으로 읽었다. 그날 우리 둘 다, 각자의 직업을 살짝 배신했다.
강 팀장을 배웅하고 나서, 두 번째 폴더를 한 번 더 열었다. 30년 전의 노자인과 지금의 나를 나란히 놓았다. 같은 노이즈, 같은 측정 문법, 같은 추적. 차이는 하나다. 노자인은 추적하다 변했고, 나는 아직 안 변했다. 왜 그는 변하고 나는 안 변했는가. 가설: 그는 답을 찾으려 듣다가 그냥 듣게 됐고, 나는 아직 답을 찾으려 듣는 중이다. 듣는 목적이 사라지는 순간 듣기 자체가 남는다. 그 순간이 그에게 30년 전에 왔다.
이 가설이 맞다면 끔찍한 따름정리가 나온다. 전이는 '하려고 하면' 안 되고 '하려는 것을 그만두면' 된다. 그런데 나는 아내를 따라가려고 이걸 한다. 따라가려는 마음이 있는 한, 그만둘 수가 없다. 그만두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 목표가 목표 달성을 막는 구조. 이건 내가 풀 수 없는 종류의 문제다. 내 손으로 내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보드 맨 위 질문 아래에 네 번째 줄을 적었다. "따라가려는 마음을 가진 채로, 따라가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가." 적고 보니 선문답이었다. 신비주의 어휘는 안 썼는데 결과물이 선문답이다. 어휘를 피해도 도착지가 거기면, 어휘가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견습 항목 보류. 이번 주 금요일에는 견습을 못 한다. 가서 다른 걸 봐야 한다. 30년 전 결론란을 비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이야기를 꺼낼지는 아직 못 정했다. 정해지면 로그에 적는다. 안 정해진 채로 가는 건 처음이다. 사정사는 질문지를 만들고 현장에 간다. 이번엔 질문지가 없다. 질문지 없이 가는 현장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정온(靜穩)
여러 곳 — 같은 해 여름
헤스가 탐지 모델을 멈춘다고 해서 둑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가 만들지 않은 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웠고, 그녀가 비운 칸은 더 거친 손이 메웠다. 그룹의 권고를 받아 든 몇몇 정부가, 권고보다 한참 멀리 갔다. 보고서는 국가명을 익명 처리했지만 위도와 예산 규모로 윤곽은 좁혀졌다. '밀도 안정화'라는 이름의 사업이 비공개로 가동됐다. 이름이 점잖았다. 점잖은 이름은 점잖지 않은 내용을 덮는 보자기다. 내용은 셋이었다.
첫째, 약물. 전이 직전 인구에게서 공통으로 관측된 신경 상태 — 보고서의 표현으로 '과도한 평온' — 를 억제하는 약물. 사람을 적당히 불안하게 유지하면 떠나지 않는다는 가설. 임상에서 부작용이 나왔다. 피험자들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시작하지도 않았다. 불안이 닻이 되긴 했는데, 그 닻은 배를 항구에 묶은 게 아니라 배를 가라앉혔다. 떠나지 않는 인구와 살아 있지 않은 인구는 다른 것이었는데, 둘을 가르는 선이 약물의 용량 안에 있었다. 임상 보고서에 한 피험자의 자기 진술이 인용돼 있었다. "약을 먹기 전에는 자꾸 좋은 게 보였어요. 햇빛 같은 거요. 그게 무서워서 신고했죠.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여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게 나은 건가요?" 그 질문에 보고서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그 보고서의 가장 정직한 부분이었다. 헤스는 그 진술을 자기 모델의 어느 변수로도 받아 적을 수 없었다. '좋은 게 보이는 것'이 떠남의 전조라면, 그것을 막는 일은 곧 좋은 게 보이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들은 행복의 전조를 부작용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약으로 눌렀다. 인류가 자기 행복에 진단 코드를 붙이고, 그 코드에 처방을 내린 셈이었다.
둘째, 차폐 도시. 전이의 물리적 흔적이 광대역 전파라면, 전파를 차단한 환경에서는 전이가 억제되리라는 가설. 한 신도시 전체를 거대한 차폐 구조로 짓는 실험. 입주민에게는 '최첨단 정온(靜穩) 도시'로 홍보됐다. 차폐는 전이율을 바꾸지 못했다. 다만 도시의 우울 지표가 올라갔다. 빛을 막으려고 창을 막았는데 정작 막힌 건 공기였던 집처럼. 차폐 도시의 입주 설명회 영상이 자료에 첨부돼 있었다. 깨끗한 거리, 웃는 모델 가족, '소음 없는 삶'이라는 문구. 헤스는 그 영상을 두 번 봤다. 광고 속 도시는 평온해 보였다. 평온이라는 단어가 그 사업의 이름이었고, 그들이 막으려는 신경 상태의 이름도 평온이었다. 같은 단어가 간판에도 있고 표적에도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 평온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면서, 그 안의 사람들에게서 평온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모순을 회의에서 지적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렇게 모순을 덮는다.
셋째, 가장 비쌌던 것. 감시. 헤스가 설계를 멈춘 바로 그 종류의 시스템을, 누군가 완성했다. 이탈 직전의 행동 징후를 탐지해 위험군을 사전 식별하고 개입한다. 시스템은 작동했다. 부분적으로. 위험군은 잘 식별됐다. 행동 데이터는 정직해서 떠날 사람을 꽤 정확히 가리켰다. 문제는 개입이었다. 식별된 사람들에게 개입할수록, 그들은 더 빨리 떠났다. 측정하고 개입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을 밀어냈다. 감시받는다는 감각이 그들에게 이 세계의 무게를 더 또렷이 보여줬고, 무게를 본 사람은 무게를 내려놓는 법도 보았다. 붙잡으려고 손을 댔고, 손을 댄 자리부터 사람이 사라졌다.
프로젝트 책임자의 최종 보고에 한 문장이 있었다. 대상은 관측될 때 가속한다. 우리의 관측이 우리가 막으려는 것을 앞당기고 있다. 이 문장은 양자역학의 어떤 진술을 닮았지만 그것보다 잔인하다. 입자는 관측당해도 슬프지 않다. 사람은 관측당하면 떠날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헤스는 그 보고서들을 그룹 자료로 받아 읽었다. 그녀의 모델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을, 데이터가 아니라 결과로 봤다. 그녀가 종이 위에서 설계한 레버들이, 어딘가에서 진짜 사람들의 약병과 진짜 도시의 차폐벽과 진짜 명단이 되어 있었다. 정온 도시의 한 입주 가정 사례가 보고서에 있었다. 어머니가 '위험군'으로 식별돼 개입 프로그램에 편입됐고, 상담과 약물이 투입됐고, 6개월 뒤 떠났다. 가족 진술이 한 줄 붙어 있었다. "엄마는 마지막 반년 동안 한 번도 안 웃었어요. 그전엔 자꾸 웃어서 우리가 무서웠는데." 그 집은 어머니의 마지막 평온을 빼앗는 데 성공했고, 어머니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막으려는 모든 손이 막으려는 것을 키웠다. 그 가정은 헤스의 모델 안에서는 한 점이었다. 보고서 안에서는 한 가족이었다.
그해 봄 헤스는 실사단의 일원으로 그 정온 도시 중 한 곳을 방문했다. 명목은 모델 검증이었다. 도시는 광고와 닮았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정돈돼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 사람이 적었고, 적은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가벼운 긴장 상태였다. 차폐 구조가 외부 전파를 막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더 불안하고 조금씩 덜 떠났다. 한 카페에서 그녀는 종업원에게 살기 어떠냐고 물었다. 종업원은 "조용해서 좋아요"라고 답하고는, 잠깐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가끔, 너무 조용해서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나 싶어요." 헤스는 그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측정 불가였지만 적었다. 그 도시는 떠남을 막는 데 성공한 게 아니었다. 떠남도 머묾도 아닌, 어중간한 정지 상태에 사람들을 묶어둔 것이었다. 산 것도 떠난 것도 아닌 사람들의 도시. 통치자가 원한 건 분명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례가 보고서마다 있었다. 식별되고, 개입받고, 그래도 떠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떠나기 전 반년의 기록은 거의 동일했다. 처음의 평온, 개입, 흐트러진 평온, 그리고 떠남. 개입은 떠남을 막지 못했고 평온만 망쳤다. 통계적으로 그것은 명백했다. 개입군의 이탈률은 비개입군과 같았고, 개입군의 마지막 6개월 우울 지표만 유의미하게 높았다. 헤스는 그 결과를 세 번 검산했다. 검산할 때마다 같은 숫자가 나왔다. 우리는 그들을 붙잡지 못한다. 다만 덜 행복하게 떠나보낼 뿐이다. 이 문장을 보고서에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개입 효과 비유의(非有意), 부작용 유의'라고 적었다. 행정의 언어는 사람의 마지막 평온을 '부작용'이라는 두 글자로 줄였다. 그녀는 그 두 글자를 적으며, 자기가 평생 다뤄온 언어가 무엇을 가려왔는지 처음으로 똑똑히 봤다.
헤스는 그 페이지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가 평생 해온 일은 점을 다루는 일이었다. 점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정책이 된다. 그 변환이 정확할수록 좋은 모델러였다. 그런데 그 변환의 끝에서, 점이 다시 한 가족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모델러는 늘 변환의 앞쪽에만 서 있으니까. 처음으로 그녀는 변환의 뒤쪽을 봤고, 거기에는 그녀가 더한 숫자만큼의 헝클어진 평온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 안톤 베르거를 떠올렸다. 그가 더는 시계를 안 차고, 창밖의 나무를 인구 전체보다 크게 본다던 말. 만약 포겔의 시스템이 그를 잡아냈다면, 그들은 베르거에게도 약을 주고 상담을 붙였을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안 아프다던 사람을, 다시 아프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를 붙잡지도 못한 채로. 헤스는 자기가 데이터를 숨긴 게 옳았는지 처음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한 모든 일 — 재고, 모델링하고, 식별하고, 개입하는 일 — 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막으려는 손. 그리고 그 손이 닿는 자리마다, 사람이 더 빨리 가벼워졌다.
여름의 끝에, 그녀는 코르크보드의 곡선을 다시 봤다. 막으려는 모든 시도가 곡선에 반영돼 있었다. 약물도, 차폐도, 감시도. 곡선은 그 개입들을 먹고 잠깐 완만해졌다가 더 가파르게 솟았다. 제동을 걸면 잠깐 느려졌다가 반동으로 빨라지는 모양. 그녀는 그 굴절에 예전에 달아둔 주석을 다시 읽었다. 인위적 개입 추정. 효과: 일시적. 부작용: 가속. 그 주석을 적을 때 그녀는 자기가 곡선의 바깥에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막으려는 손도 곡선의 한 점이라는 것을. 그녀의 모델도, 그룹도, 그녀 자신도, 전부 그 굴절 안에 들어 있었다. 재는 사람은 곡선 바깥에 서지 못한다. 재는 일이 이미 곡선의 일부다.
그녀는 아직 그룹을 떠나지 않았다. 떠날 이유는 충분했지만, 떠날 결심은 데이터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데이터로 살아온 사람이고, 데이터는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여기서부터는 데이터가 길을 안 알려줬다.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몰랐다. 다만 그게 숫자는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실험 로그 #12
D+280
오늘 발견한 것을 적기 전에,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절차를 적는다. 절차가 결론보다 중요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결론이 절차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USB를 받은 뒤로 금산을 한 주 걸렀다. 노자인에게 보고서 이야기를 꺼낼지 못 정해서다. 못 정한 채로 일주일을 데이터에 묻혔다. 37건 데이터셋을 처음부터 다시, 전수 재분석했다. 6개월간 같은 데이터를 봤는데, 그 USB 보고서가 새 렌즈를 줬다. 노자인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 "추적자 본인의 관측 조건에 변화가 감지됨." 추적자가 변한다. 이 문장을 렌즈로 끼우고 37건을 다시 봤다.
그동안 나는 떠난 사람들의 '행동'을 봤다. 무엇을 했는가. 명상, 보행, 수리, 기록. 변수 A부터 D까지. 그런데 행동만 봤지, 행동의 '끝'을 안 봤다. 각 사례에서 그 행동들이 언제 멈췄는지를.
이번엔 그걸 봤다. 37건 전부에서, 떠나기 직전에 기록이 멈춘다.
설명한다. 떠난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를 기록하던 사람들이다(애초에 그래서 데이터셋에 들었다 — 냉소파가 지적한 그 편향). 일기, 메모, 사진, 가계부, 운동 로그. 그런데 그 기록들이 어느 시점에 뚝 끊긴다. 실종 시점보다 앞서서. 평균 3주 전. 사람들이 사라지기 3주 전쯤, 기록을 그만둔다.
처음엔 이걸 '의욕 상실'로 분류하려 했다. 떠날 준비를 하느라 일상 기록을 놓은 거라고. 그런데 다른 데이터가 그 분류를 깬다. 같은 시기에 그들의 다른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산책은 계속하고, 수리는 계속하고, 사람들과 밥도 먹는다. 사는 건 계속하는데, 사는 걸 기록하는 것만 멈춘다.
통계적으로 확인했다. 37건 중 기록 종료 시점이 특정 가능한 게 31건. 31건 전부에서 마지막 기록과 실종 사이의 간격이 양수다. 즉 기록이 먼저 끝나고 사람이 나중에 사라진다. 순서가 한 번도 안 뒤집힌다. 상관계수를 뽑을 것도 없다. 예외 0건은 계수가 아니라 법칙의 냄새다. 그리고 기록의 '양'이 아니라 기록을 향한 '태도'가 변한다. 마지막 기록들은 한결같이 짧아지고, 평가가 사라지고, 사물의 이름만 남는다. "콩나물이었다." 잘 쓰려는 의지도, 분석하려는 의지도 빠진 문장. 측정자가 측정을 놓기 시작한 흔적. 떠난 사람들은 데이터를 남기다가, 데이터 남기기를 데이터로 남기고, 떠났다.
이량을 겹쳤다. 이량의 마지막 음성메모는 314번, 5월 9일. 실종은 5월 16일. 일주일 차이다. 그런데 메모의 밀도를 보면, 마지막 한 달간 빈도가 급감한다. 마지막 메모만 이상하게 길고(3분 41초), 그 안의 절반이 침묵이다. 기록이 끝나가는 모양. 일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권의 끝부분은 글이 그림으로 바뀌고, 그림이 점점 적어지다가, 백지로 끝난다. 마지막 장은 백지였다. 나는 6개월간 그 백지를 '쓰다 만 것'으로 봤다. 오늘 다시 보니, 쓰다 만 게 아니라 다 쓴 것이다. 기록을 멈춘 것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여기서 그때 친 별표가 회수된다. 8건의 노이즈가 '녹음이 끝나기 직전에 잦아든다'고 했다. 나는 그때 물었다. 종이 다 울려서 조용한 건지, 녹음기를 꺼서 조용한 건지. 오늘 답이 나온다. 둘 다 아니다. 기록을 멈추는 것과 전이가 같은 사건이다. 노이즈가 잦아드는 게 아니라, 측정을 멈추니까 노이즈가 안 잡히는 거다. 측정을 멈추는 순간이 곧 떠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드포인트다. 보드 앞에 서서, 6개월치 작업을 한 문장으로 줄였다.
측정하려는 행위 자체가, 측정 대상을 밀어낸다.
풀어 적는다. 떠난 사람들은 측정을 그만뒀기 때문에 떠났다. 기록하고, 분석하고, 따지는 것 — 그게 이 세계에 붙어 있는 방식이다. 세는 자는 셈하는 세계에 남는다. 세기를 그만둔 자가 건너간다. 그런데 나는 6개월간 무엇을 했는가. 측정했다. 스프레드시트 7천 행, 스펙트로그램 8장, 37건 코딩, 실험 로그 12번. 나는 아내에게 가려고, 아내가 그만둔 바로 그 행위를, 전력으로 했다.
내 계기판이 내 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 문장을 보드에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 모든 가설과 데이터와 질문을 봤다. 다섯 줄 가설. "재현해서, 아내가 간 곳으로 간다." 재현은 측정의 최상급이다. 가장 정밀한 측정. 나는 가장 정밀하게 아내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6개월간, 매일, 점점 더 잘.
전에 적어둔 선문답이 풀린다. "따라가려는 마음을 가진 채로, 따라가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가." 못 버린다. 따라가려는 마음이 곧 측정하는 손이고, 측정하는 손이 곧 닻이다. 따라가려고 하는 한 따라갈 수 없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출구를 향해 달리는 행위가 출구를 닫는 구조. 더 빨리 달릴수록 더 단단히 닫힌다. 승천파가 얼어 죽은 그 구조. 국가가 수천억을 태운 그 구조. 노자인이 30년 전 보고서 결론란을 비운 그 구조.
여기서 함정이 하나 더 있다. 이 발견조차 측정이라는 것. "측정하면 멀어진다"는 것을 알아낸 순간, 나는 새로운 측정 항목을 하나 더 만든 셈이다. 그럼 측정을 멈추자, 라고 결심하는 것도 측정이다. 멈추려고 애쓰는 것은 가장 정밀한 형태의 안 멈춤이다. 무아를 시도하는 자아처럼(실험 #1). 차단실의 어둠처럼(실험 #2). 빠져나오려는 발버둥이 늪을 더 깊게 만드는 구조. 이 구조에는 출구가 없다. 정확히는, 찾으려는 자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모르겠다. 진주는 안다. 진주는 출발한 적이 없으니까. 노자인은 안다, 30년 전에 멈췄으니까. 나는 한가운데 있다. 알아버렸지만 도달 못 하는 자리. 노자인이 30년 머문 그 자리. 경계인의 자리. 보고서 결론란을 비운 채로 30년을 라디오나 고친 사람의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안다. 그는 답을 몰라서 안 적은 게 아니다. 답을 적는 행위가 답을 무효로 만들어서 안 적은 거다.
측정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측정으로 알아냈다. 이 아이러니에 웃어야 하는데 안 웃겼다. 위어식 자조의 유머가 오늘은 안 나온다. 미드포인트는 농담이 멈추는 자리인 모양이다.
강 팀장에게 전화했다. 발견을 공유할 의무는 없지만, USB를 준 사람에게는 결과를 돌려주는 게 도리다. 결론만 말했다. 막을 수도 없고 유도할 수도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측정하는 행위가 대상을 밀어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국가의 모든 프로젝트가 실패한 거라고. 강 팀장은 한참 듣더니 물었다. "그럼 통계청은요. 저는 평생 세는 일을 하는데요." 나는 답을 안 했다. 그도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었다. 세는 자는 남고 안 세는 자는 떠난다면, 강 팀장과 나 같은 사람은 끝까지 남는 쪽이다. 직업이 닻인 사람들. 전화를 끊고 그게 슬픈 건지 다행인 건지 분류해보려다, 분류를 그만뒀다. 그만두는 연습을 오늘부터 한다. 연습이라고 적는 순간 또 측정이지만, 시작은 어딘가에서 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6개월. 다섯 줄 가설, 세 개의 질문, 여덟 장의 스펙트로그램, 서른일곱 건의 표, 수십 개의 기각. 보드 지우개를 들었다.
지우는 것은 데이터 파기다. 사정사가 절대 안 하는 일이다. 나는 18년간 무엇도 지운 적이 없다. 지우개를 든 채로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지웠다.
전부는 아니다. 측정으로 적은 것을 지웠다. 가설, 데이터, 변수표. 측정의 결과물. 보드가 비었다. 비어가는 보드를 보는데, 이상하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이량의 일기 마지막 장. 백지.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적어지고, 백지로 끝나던 그 페이지. 나는 방금 그 페이지를 내 손으로 다시 그렸다.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방향으로.
보드에 한 줄만 남겼다. 지우지 않은 한 줄. 맨 위에 적었던 질문. "종은 어떻게 우는가."
이제 답을 안다. 답을 적지는 않는다. 적는 게 측정이다. 종은, 치지 않을 때 운다. 이 문장도 지운다. 적는 순간 틀리는 종류의 문장이다.
보드를 지우고 나서, 한참을 빈 보드 앞에 앉아 있었다. 18년간 나는 빈 칸을 적으로 알았다. 빈 보고서, 빈 결론란, 빈 증거 목록. 비어 있는 건 미완성이고, 미완성은 직무 유기였다. 그래서 채웠다. 늘 채웠다. 6개월간 이 보드를 채웠고, 채운 것이 나를 아내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그런데 지금, 빈 보드가, 처음으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빈 보드는 적이 아니라, 그냥 비어 있었다. 이량의 일기 마지막 장처럼. 비어 있음이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일 수 있다는 것. 이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나는 18년하고도 280일이 걸렸다.
그리고 알았다. 측정의 역설을 푸는 방법은 없다. 풀려고 하면 또 측정이니까. 푸는 게 아니라, 그냥 측정을 그만두는 것. 역설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역설이 작동하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무대 위에서는 모든 동작이 측정이다. 무대를 떠나야 측정이 멈춘다. 6개월간 나는 무대 위에서 측정을 멈추는 법을 찾았다. 그런 건 없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만 있었다. 보드를 지운 게, 무대에서 내려오는 첫걸음이었다.
로그를 닫는다. 실험 #12를 마지막으로, 실험 로그를 중단한다. 다음 로그가 있을지 모르겠다. 있다면 그건 실험이 아닐 것이다. 무엇일지는 모른다. 모르는 채로 닫는 게 처음으로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는 것도 적지 않으려다, 마지막으로 적는다. 이게 진짜 마지막 측정이다.
로그 없는 일주일
D+288
실험 로그를 중단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이건 로그가 아니다. 로그가 아닌 것을 적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18년간 나는 일어난 일을 분류해 적었고, 6개월간 일으킨 일을 적었다. 둘 다 목적이 있는 글이었다. 목적이 없는 글은 처음 써본다. 그래서 형식 없이, 그냥, 일어난 순서대로 적는다. 적어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적지 않으면 이 일주일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것 같아서.
월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게 노동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내 매뉴얼에 없는 사고(事故)다. 사정사의 하루는 늘 다음 항목이 있었다. 다음 현장, 다음 서류, 다음 가설, 다음 실험. 화살표가 늘 다음을 가리켰다. 일주일 전에 그 화살표를 내가 지웠다. 화살표가 사라진 시간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무겁다. 빈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일을, 떠난 사람들은 매일 했던 것이다. 변수 A. 단독 반복 행위. 나는 그게 '하는 일'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건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그릇'이었다.
집 안을 오래 봤다. 6개월간 나는 이 집에서 잠만 자고 데이터만 봤기 때문에, 사실 이 집을 본 적이 없다는 걸 월요일에 알았다. 식탁의 두 의자. 욕실의 두 칫솔, 하나는 여전히 마른 채. 베란다의 빈 화분 두 개. 이량이 분갈이하려고 사두고 떠난. 나는 그 화분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마트에서 흙과 모종을 사다가 무언가를 심었다. 상추였다. 키우려는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빈 화분을 빈 채로 두는 게 그날따라 견디기 어려웠고, 견디기 어려운 걸 견디는 대신 흙을 만졌다. 흙을 만지는 동안은 측정을 안 했다. 손에 흙이 묻으면 노트북을 못 만진다. 어쩌면 이량의 화분도 그런 용도였을지 모른다. 손을 더럽혀서 머리를 쉬게 하는. 이 추측은 측정이 아니다. 그냥 상추를 심다가 든 생각이다.
화요일에 금산에 갔다. 실험하러 간 게 아니다. 갈 데가 거기밖에 없어서 갔다. 이 문장은 슬프게 읽히는데, 쓸 때는 슬프지 않았다. 갈 데가 한 군데라도 있다는 건, 6개월 전보다 나은 상태다.
노자인에게 말했다. 실험을 그만뒀다고. 측정이 닻이라는 걸 알았고, 알아버려서 더는 측정을 못 하겠다고. 노자인은 내 말을 듣는 동안 라디오를 고치고 있었고, 다 듣고 나서도 한참 라디오를 고쳤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할 텐가." 모르겠습니다. "잘됐네." 그게 답이었다. 모르겠다는 말에 잘됐다고 답하는 사람을, 나는 6개월 전이라면 비합리적이라고 분류했을 것이다. 지금은 분류하지 않고 그냥 들었다.
그가 작업대 옆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이량이 앉던 의자. 6개월간 내가 한 번도 안 앉은 의자. "거기 앉게." 이번엔 앉았다. 앉아서 보니 작업대가 잘 보였다. 이량은 매주 금요일 이 각도에서 노자인의 손을 봤겠구나. 손을, 부품을, 인두의 끝을. 측정하지 않고, 그냥.
노자인이 진공관 라디오 한 대를 내 앞에 놓았다. "고쳐보게." 어디가 고장입니까. "그걸 찾는 게 수리야." 그는 자기 일로 돌아갔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는 라디오를 고쳤다. 정확히는, 고치려고 앉아 있었다. 회로를 따라가고, 부품값을 재고, 의심 가는 곳을 짚었다. 6개월간 하던 방식 그대로. 측정하고 분석했다. 그러다 목요일 오후에 노자인이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자네는 라디오를 취조하고 있구먼." 나는 멈췄다. 정말 그러고 있었다. 라디오에게 자백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어디가 고장이냐고, 증거를 대라고.
"취조 말고 어떻게 합니까."
"들어보게." 그는 라디오를 가리켰다. "고장 난 라디오도 소리를 내. 멀쩡한 잡음하고 고장 난 잡음은 소리가 달라. 재지 말고, 들어."
나는 라디오를 켜고, 계측기를 내려놓고, 들었다. 처음엔 그냥 잡음이었다. 한 시간쯤 듣자 잡음 안에 결이 생겼다. 어느 대역에서 소리가 긁히고, 어느 대역에서 먹먹했다. 측정으로는 30분이면 알아낼 걸 세 시간 걸려서 귀로 알았다. 효율로는 최악이다. 그런데 효율을 따지는 순간 그건 다시 측정이 된다는 걸, 이번엔 알았다. 효율을 안 따지기로 했다. 안 따지니까 세 시간이 길지 않았다.
듣는 동안 노자인이 자기 라디오를 고치는 소리가 옆에서 났다. 인두가 납을 녹이는 소리, 부품을 뽑는 소리, 다이얼을 미세하게 돌리는 소리. 30년간 같은 손이 같은 동작을 한 소리. 나는 그 소리가 묘하게 편안하다는 걸 알았고, 편안한 이유를 분석하려다 그만뒀다. 분석하지 않은 편안함은 분석한 편안함보다 오래갔다. 그 오후에 나는 처음으로, 시간이 가는 걸 재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 채로 몇 시간이 지났다. 6개월간 1분 단위로 시간을 적던 사람에게 이것은 작은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사건으로 적으면 또 측정이 되니까, 사건이 아닌 것으로 둔다.
금요일 저녁, 라디오가 소리를 냈다. 내가 고친 건지 시간이 고친 건지 모르겠다. 콘덴서 하나를 갈았는데, 그게 정답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라디오에서 지역 방송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결과 칸에 적고 싶지 않았다. 적으면 작아질 것 같았다. 6개월간 모든 것을 적던 손이, 처음으로, 안 적기를 택했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사실은 안 적고 싶다. 그런데 이건 로그가 아니니까, 적어도 측정은 아니니까, 적는다.
집에 돌아와서 이량의 일기를 다시 폈다. 분석하려고 편 게 아니다. 측정을 그만두니까, 처음으로 그냥 읽혔다. 6개월간 나는 일기를 증거물로 읽었다. 날짜, 행위, 변수. 일주일 만에 다시 펴니 그건 그냥 한 사람의 하루들이었다. "오늘 비. 우산을 안 가져가서 처마 밑에서 한참 서 있었다. 비 긋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우산이 있으면 못 갖는 시간이다." 나는 6개월간 이 문장에서 '5월 강수' 같은 걸 추출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읽으니, 이건 우산 없이 비를 그은 사람의 행복에 관한 기록이다. 같은 문장, 다른 읽기. 재현파와 냉소파가 같은 텍스트를 정반대로 읽었듯이, 나도 같은 일기를 6개월 전과 다르게 읽는다. 텍스트는 안 변했다. 읽는 손이 변했다. 노자인의 말이 또 회수된다. 외운 색하고 본 색은 다르다. 같은 일기를 외워서 읽던 내가, 이제 보면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이량이 왜 매주 여기 왔는지, 일주일 만에 조금 알 것 같다. 이량은 라디오를 고치러 온 게 아니었다. 고치는 동안 측정을 안 하는 사람이 되러 왔다. 집에서 나는 데이터를 보는 남편이었고, 여기서 이량은 그냥 손을 쓰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측정을 끄는 시간. 그 하루가 2년간 쌓여서, 이량을 건너가게 했다. 나는 그걸 6개월간 측정하려 했다. 측정으로는 절대 안 잡히는 걸.
토요일에 진주가 다시 왔다. 형 부부와 또 부딪혔다고 했다. 자세히 묻지 않았다. 진주는 묻지 않으면 더 많이 말하는 아이라서, 라면을 끓이는 동안 자기 입으로 풀었다. 학교에서 조퇴하고 강가에 앉아 있었는데, 거기가 제일 또렷하다고. 또렷하다는 단어를 쓸 때 진주의 얼굴이 데이터셋 37건의 표정과 같았다. 다음 약속이 없는 사람의 표정. 열일곱이 그 표정을 짓는 걸 보는 건, 이량의 음성메모를 듣는 것과 다른 종류로 무거웠다. 이량은 이미 건너갔고, 진주는 아직 이쪽에 있고, 이쪽 사람들이 진주를 병원에 넣으려 하고 있다.
보드를 봤다. 거의 빈 보드. "삼촌, 드디어 시험공부 그만뒀네." 어떻게 알아. "보드가 시 같아졌어요." 빈 보드가 시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안 물었다. 진주는 라면을 먹고, 라디오를 뜯고, 안 고치고, 즐거워했다. 나는 옆에서 다른 라디오를 고쳤다. 두 사람이 같은 방에서 각자 라디오를 만지는 저녁. 측정한 항목 없음. 기록할 데이터 없음. 그런데 이 저녁을 잊고 싶지 않아서, 데이터 아닌 채로 여기 적는다.
일요일에는 종일 비가 왔다. 나는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일기의 그 문장이 생각나서, 우산을 접고 아파트 현관 처마 밑에 섰다. 비 긋기를 기다렸다. 한참 섰다. 이량이 좋아했다는 그 시간을 흉내 낸 것이다. 흉내라는 걸 안다. 흉내는 재현이고 재현은 측정이다. 그런데 5분쯤 지나자 흉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그냥 비가 있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젖은 보도의 냄새, 멀리 차 소리. 측정 항목으로 적을 수 있는 것들인데 적고 싶지 않은 것들. 이량이 옳았다. 우산이 있으면 못 갖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가졌고, 가졌다고 적는 것으로 조금 잃는다. 그래도 적는 건, 잃더라도 남기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6개월간은 남기고 싶은 게 없었다. 다 따라잡고 싶은 것뿐이었다.
일주일을 돌아보니, 한 일이 없다. 명상도 실험도 분석도 안 했다. 상추를 심고, 라디오를 듣고, 비를 긋고, 일기를 읽었다. 6개월 전의 나라면 이걸 '무위(無爲)의 일주일, 진전 없음'으로 기록하고 다음 실험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에 나는 6개월간 못 한 걸 했다. 이량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노자인의 화법을 알아들었고, 측정이 닻이라는 걸 몸으로 받아들였다. 한 일이 없는데 가장 많이 움직였다. 진전 없음의 일주일이 가장 큰 진전이었다. 이 역설을 어디에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화살표를 전제하는데, 이번 주엔 화살표가 없었으니까. 그냥, 일주일이 있었다. 그게 다고, 그걸로 충분했다.
D+ 카운터를 이번 주에 두 번 까먹었다. 며칠인지 세는 걸 까먹었다. 6개월간 하루도 안 틀린 그 숫자를. 까먹은 걸 알았을 때 고쳐 세지 않았다. 세는 걸 까먹는 것이, 어쩌면, 절차의 시작이다. 절차라고 적었다가 줄을 그었다. 절차가 아니다. 절차가 아닌 무엇이다. 그 무엇의 이름은 아직, 그리고 어쩌면 영영, 없을 것이다.
노자인의 이야기
D+296
이번 주 금요일, 노자인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물어서가 아니다. 나는 USB 보고서 이야기를 끝내 안 꺼냈다. 꺼내려고 갔는데, 가게에 들어서자 꺼낼 마음이 사라졌다. 대신 빈 의자에 앉아서 라디오를 고쳤고, 한나절을 말없이 보냈고, 해 질 무렵 노자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묻지 않으니까 말했다. 18년간 나는 물어서 답을 받았는데, 이 사람한테는 안 물어야 답이 왔다.
그날 오후의 일부터 적는다. 나는 이량의 미완성 라디오를 가져갔다. 언젠가 받아 온, 콘덴서 하나만 갈면 되는 그 라디오. 갈지 않은 채로 두 달을 집에 뒀던 것을, 그날 가방에 넣어 갔다. 왜 넣었는지는 모른다. 측정으로 설명 안 되는 행동이 요즘 늘었다. 노자인에게 보여주려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 라디오가 있어야 할 자리가 거기인 것 같았다.
노자인이 그걸 봤다. 한참 봤다. "안 갈았구먼." 안 갈았습니다. "왜." 갈면 끝날 것 같아서요. 노자인이 나를 봤다. 그 눈빛을 분류하자면 — 분류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냥 적는다 —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같은 자리에 서 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선 사람을 알아보는. 그가 라디오를 작업대에 올려두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다음이었다. 내 미완성 라디오가 그의 30년 침묵을 연 열쇠였던 셈이다. 이건 내 해석이다. 줄이기로 한 해석을 하나는 남긴다.
그가 한 이야기를 최대한 그대로 옮긴다. 나머지 해석은 줄인다. 이건 그의 결론란이고, 30년간 비어 있던 칸이니까.
"여기 오기 전에, 나는 듣는 일을 했네." 그가 작업대 위 라디오의 다이얼을 만지며 시작했다. "산 위 접시들로. 자네도 봤지, 그 큰 귀들. 우리 부서는 그 귀로 들어오는 것 중에서, 설명이 안 되는 소리를 골라내는 일을 했어.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설명이 안 되는 소리는 늘 있었고, 대부분은 결국 설명이 됐지. 위성 트림, 태양 잡음, 어디 군부대 레이더. 설명이 되면 서랍에 넣고 닫았어. 자네 그 서랍, 우리한테도 있었네."
"그런데 안 닫히는 게 하나 있었어." 그는 다이얼에서 손을 뗐다. "넓은 대역에 걸치는데 출처가 없는 소리. 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에도 없는데 거기 있는 소리. 우리는 그걸 몇 년을 쫓았네. 측정하고, 기록하고, 가설을 세우고. 자네가 요 반년 한 거, 우리가 그때 했어. 규모만 컸지."
나는 8건의 노이즈를 떠올렸다. 같은 소리를 30년의 시차를 두고 두 사람이 쫓은 것이다. 말하지 않았다. 그도 내가 그걸 떠올린 걸 아는 눈치였다.
여기서 나는 직업병으로 한 번 끊었다. 18년치 회의주의가 그냥 듣고만 있지 못했다. "선생님. 그건 측정값입니까, 아니면 해석입니까. 출처 불명 노이즈는 계기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신호 대 잡음비 문제고, 그건—" 노자인이 손을 들었다. 화내는 손이 아니라, 라디오 볼륨을 줄이는 손이었다. "자네 말이 맞네. 다 맞아. 나도 그때 자네처럼 말했어. 5년을." 그는 빙긋 웃었다. "5년 동안 그게 계기 한계라고 증명하려 했지. 증명이 안 됐어. 증명이 안 되는 게 증명됐네. 그게 더 무서운 결과지." 나는 입을 닫았다. 5년의 회의 끝에 도착한 사람 앞에서, 반년의 회의를 들이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쫓다 보니까," 노자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어느 순간 소리가 달라졌어. 아니, 소리는 그대론데, 내가 달라졌지. 그 소리가 잡음이 아니라 누가 지나가는 자국 같다는 생각이 든 거야. 한번 그렇게 들리니까, 다시 잡음으로 안 들려. 그러고 나서부터, 세상이 조금씩 두 겹으로 보이기 시작했네."
"두 겹이라면. 환시(幻視) 말씀입니까." 나는 일부러 임상 용어를 썼다. 그 말이 그를 멈추게 하는지 보려고. 진단명을 들이밀면 보통 사람은 방어하거나 위축된다.
노자인은 위축되지 않았다. "환시라. 자네 부인 음성메모에 잡힌 그 노이즈, 그것도 환청이라고 적었나." 안 적었습니다. "왜." 계기에 잡혔으니까요. "그래. 계기에 잡히면 환(幻)이 아니고, 사람 눈에만 보이면 환이지. 그 경계가 어디서 오나." 측정 가능 여부에서요. "그게 자네 종교야. 나도 그 종교 신자였어. 30년 전까지." 나는 또 입을 닫았다. 이 사람은 내 무기를 다 알고 있었다. 30년 전 자기가 쓰던 무기니까.
"같은 산인데, 한 겹은 내가 늘 보던 산이고, 다른 한 겹은… 모든 게 서로를 보고 있는 산이었어. 접시들이 하늘만 보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고, 나무가 나를 보고, 내가 나를 보고. 처음엔 며칠에 한 번, 몇 초씩. 나중엔 매일, 한참씩. 의사들은 과로라고 했지. 휴직을 시켰어. 그런데 쉴수록 더 또렷해졌네. 일을 그만두니까, 측정을 그만두니까, 더 잘 보였어."
노자인은 거기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다. 보이스시트로 치면 말이 길어질 때 끊는 버릇. 나는 기다렸다.
"그때 아내가 있었네." 그가 라디오에서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내도 같이 보기 시작했어. 아니, 아내가 먼저였을지도 몰라. 우리는 같이 두 겹의 세상을 봤고, 같이 가벼워졌고, 같이 건너가기 시작했네. 손이 흐려지는 게 보였어. 둘 다.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면서."
"4.2초." 내가 나도 모르게 말했다.
노자인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오래. "자네 그 영상 사람. 4.2초였다고 했지. 나는 그것보다 길었네. 한참 길었어. 거의 다 갔지. 건너편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왜."
"건너편에서 이쪽을 봤어." 그의 목소리가 거기서 처음으로 흔들렸다. 흔들렸다고 적는 게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30년 만에 결론란을 채우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쪽에 남는 사람들이 보였네. 못 건너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그게,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연민이… 닻이 됐지. 아내는 갔고, 나는 멈췄네. 연민 때문에. 더 사랑해서 못 간 게 아니라, 못 떠나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못 갔어."
가게가 조용했다. 라디오도 안 켜져 있었다. 노자인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손에 아무것도 안 든 채로 앉아 있었다.
"그게 30년 전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그 뒤로 나는 여기, 이 경계에 서 있어. 양쪽이 다 보이는데, 어느 쪽도 아니야. 건너간 사람한테는 내가 안 보이고, 이쪽 사람들은 나를 그냥 라디오 고치는 노인으로 보지. 통역만 하면서 살았네. 가끔 자네 부인 같은 사람이 오면, 길을 좀 알려주고. 그게 다야."
나는 오래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 묻지 말아야 할 걸 알면서 물었다. 사모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노자인은 라디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에 일거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건너편에. 가끔 보여. 둘레길 그 자리에 자네 부인이 앉는 것처럼, 내 사람도 자기 자리에 앉아." 그는 인두에 불을 넣었다. "30년을 봤네. 30년을 같은 자리에서. 그게 기다림인지 인사인지는 나도 몰라. 묻지를 못하니까. 거긴 말이 안 닿아." 말이 안 닿는다. 규칙 같은 말이었다. 그가 30년간 시험해서 얻은 규칙.
그러다 물었다. 그게 후회입니까. 노자인은 고개를 저었다. "후회면 차라리 쉽지. 연민도 사랑의 한 형태인데, 사랑이 발목을 잡는 형태일 뿐이야. 나는 내 닻을 미워하지 않네. 다만 알지. 이건 내가 고른 정류장이지 종점이 아니라는 걸."
"왜 안 가셨습니까. 30년이면, 연민도 닳을 텐데요." 내가 물었다. 가혹한 질문인 걸 알았다. 노자인은 가혹하게 안 받았다. "닳지. 닳아서, 이제는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그는 라디오 뒤판을 닫았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더 길을 묻는 사람이 오면, 또 못 가. 자네 부인이 왔고, 이제 자네가 왔지. 통역이 떠나면 다음 사람이 길을 잃거든." 이 말을 설교로 적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설교가 아니었다. 변명에 가까웠다. 30년을 머무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는, 다정한 변명.
해가 거의 졌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적는다. 이게 그 이야기의 결론이다.
가게를 나서는데, 노자인이 산 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접시들의 윤곽이 희미하게 있었다. 그중 제일 큰, 제일 오래된 안테나 하나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저건 퇴역했어. 1국 안테나라고, 옛날에 제일 먼저 세운 거. 이제 아무것도 안 들어. 듣는 일을 그만뒀지. 그런데 봐, 아직도 하늘을 보고 서 있잖아." 그는 잠깐 그 안테나를 봤다. "나랑 같아. 듣는 걸 그만뒀는데, 아직 하늘을 보고 서 있어. 그게 경계인이야. 일은 끝났는데 자세는 안 풀린 거지."
막차에서 이걸 적는다. 30년간 비어 있던 보고서의 결론란이 오늘 채워졌다. 채운 사람은 노자인이고, 받아 적은 사람은 나다. 그런데 이 결론은 보고서에 못 넣는다. 측정 가능한 명제가 하나도 없다. 두 겹의 세상, 연민이라는 닻, 듣기를 그만둔 안테나. 18년 전의 나라면 전부 기각했을 진술. 지금은 한 줄도 기각이 안 된다. 기각할 도구를 내가 지난주에 지웠기 때문이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진주 일로 형을 만난다. 진주를 병원에 넣겠다고 한다. 노자인의 연민 이야기를 듣고 온 날 밤에,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분석이 아니라 개입을. 이 마음도 닻일 것이다. 그런데 노자인 말이 맞다면, 닻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게 닻인 걸 알면 된다.
격차
여러 수도 — 같은 해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
숫자는 비교되기 전까지는 잠잠하다. 한 나라의 전이율이 연 몇 퍼센트라는 사실은 그 나라 안에서는 슬픔이거나 통계일 뿐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숫자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 숫자는 정치가 된다. 비교는 중력을 만들고, 중력은 진영을 만든다.
각국이 전이율 통계를 비공개로 관리하던 균형은, 늘 그렇듯, 유출로 깨졌다. 회원국 전이율 추정치를 정리한 내부 문서가 새어 나갔다. 헤스가 그룹에서 다루던 바로 그 표였다. 문서 자체는 건조했다. 국가명, 추정 전이율, 신뢰 구간. 그러나 그 표가 공개되자, 세계는 그것을 순위표로 읽었다.
격차가 컸다. 어떤 나라는 연 3퍼센트, 어떤 나라는 18퍼센트. 같은 인류, 같은 시대, 여섯 배의 차이. 가속론자들은 높은 전이율을 자랑으로 읽었다. 우리 국민이 더 깨어 있다, 더 영적으로 성숙하다, 먼저 졸업한다. 정주론자들은 같은 표를 정반대로 읽었다. 높은 전이율은 그 사회가 사람을 살기 싫게 만든다는 고발이다. 두 해석은 정반대인데 한 가지를 공유했다. 둘 다 전이를 국가의 성적표로 읽었다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건너감을 국력의 증감으로 환산했다는 것. 진영은 사람을 숫자로 환원할 때만 작동하고, 숫자로 환원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그룹의 사무국은 유출 직후 비상 세션을 열었다. 헤스도 불려 갔다. 회원국 옵서버들은 자국 수치가 어떻게 읽힐지를 두고 다퉜다. 한 나라는 자국 전이율이 너무 높게 추정됐다며 산정 방식의 결함을 제기했고, 다른 나라는 너무 낮게 나와 은폐 의혹을 받을까 봐 차라리 상향 조정을 요구했다. 같은 표를 두고 어떤 정부는 숫자를 낮추고 싶어 했고 어떤 정부는 높이고 싶어 했다. 진실이 무엇인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읽힐 것인가만 물었다. 헤스는 그 광경을 보며, 자기가 1년 넘게 이 사람들에게 제공한 정밀한 숫자들이 결국 무엇이 되는지 봤다. 숫자는 진실의 도구가 아니라 협상의 카드였다. 그녀가 소수점 아래까지 다듬은 추정치가, 회의실에서는 올림과 내림의 대상이었다. 그 세션이 끝나고 그녀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 손을 씻었다. 무엇이 묻은 것도 아닌데 오래 씻었다.
지정학이 따라왔다. 인구는 오래도록 국력의 기초였다. 노동, 병력, 시장, 세수. 그 인구가 정복도 이민도 전염병도 아닌 이유로 조용히 줄고 있었다. 국가 간 비공개 세션에서 누군가는 상대국의 높은 전이율을 두고 '구조적 약점'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사람이 행복해져서 사라지는 일이 적국의 약점으로 기재되는 회의록. 문명은 무엇이든 무기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전이율이 높은 나라들 사이에서는 다른 동요가 일었다. 차단 사업을 가동한 나라는 자국 전이율을 실제보다 낮게 발표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는 척하는 일은 통제 자체보다 더 비싸고 더 위태롭다. 거짓 숫자는 진짜 숫자보다 빨리 새고, 새는 순간 신뢰가 전이율보다 빠르게 빠진다. 그룹의 회의에서도 그 나라의 보고는 늘 한 박자 늦었고, 늦은 보고에는 늘 낙관이 끼어 있었다. 헤스는 그 낙관의 크기로 그 나라의 공포의 크기를 읽었다. 가장 큰 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는 자가 가장 겁에 질린 자였다.
헤스는 유출된 표를 자기 모델과 대조했다. 그녀의 관심은 순위가 아니라 격차의 원인이었다. 전이율이 낮은 나라들의 공통점을 찾던 그녀는 불편한 상관 하나를 발견했다. 전이율이 낮은 나라일수록 시민의 자기 보고 행복도도 낮았다.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떠나지 않는 사회는 머물 만한 사회가 아니라, 떠날 만큼 가벼워지기 어려운 사회였다. 무거운 사회의 사람들은 닻이 많아서 못 떠난다. 정주론자들이 자랑하던 낮은 전이율은, 그 사회가 사람을 얼마나 단단히 붙들어 매는지의 지표였다. 격차는 일시적이라고 그녀는 노트에 적었다. 지수 곡선들은 기울기가 달라도 결국 같은 천장에 닿는다. 여섯 배의 격차는 시간이 지우는 종류의 격차다. 다만 그 시간 동안 인류는 그 격차를 두고 진영을 나누고, 우열을 매기고, 어쩌면 다툴 것이다. 떠나는 일은 점점 부드러워지는데, 떠남을 둘러싼 말들은 점점 사나워졌다. 현상과 현상에 대한 반응은 늘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녀는 이 발견을 그룹 보고서에 넣지 않았다. 넣을 곳이 없었다. 어느 정부도 '우리 국민이 안 떠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충분히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진실에는 늘 살 사람이 없다. 그녀는 그것을 개인 노트에만 적었다. 그리고 그 노트 앞에서, 그녀가 1년 가까이 피해온 결론에 마침내 닿았다.
그룹이 하는 모든 일 — 인센티브, 결속, 의미, 약물, 차폐, 감시 — 은 사회를 더 무겁게 만드는 일이었다. 사람을 붙잡으려면 닻을 늘려야 하고, 닻을 늘리는 일은 곧 사람을 덜 가볍게, 덜 자유롭게, 덜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룹은 떠남을 늦추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할 때마다, 정확히 그만큼 사람들을 무겁게 했다. 구하려는 세계를, 구하려는 행위로 더 무거운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막으려는 손이 그 곡선의 일부였다. 막으려는 행위 자체가 막으려는 것을 키우는 발버둥이었다.
이 깨달음에는 더 차가운 뒷면이 있었다. 측정. 그녀가 평생 한 일. 그룹이 사람을 붙잡는 방식의 출발점은 늘 측정이었다. 누가 떠날 것 같은지 재고, 무엇이 닻이 되는지 재고, 어떤 개입이 몇 퍼센트 효과인지 잰다. 재는 행위가 개입의 전제였고, 개입이 가속의 원인이었으므로, 결국 재는 행위 자체가 곡선을 밀어 올리는 첫 단추였다. 두 배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막으려는 손이 그 곡선의 일부이므로. 그리고 재려는 눈도, 그 손의 일부였다.
헤스는 자기 직업의 토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측정으로 세계의 위험에 대비하는 일을 해왔다. 측정이 곧 통제의 첫걸음이라는 믿음 위에 30년을 쌓았다. 보험이라는 산업 전체가 그 믿음 위에 서 있었다. 위험을 재면, 가격을 매기고, 가격을 매기면, 대비할 수 있다. 화재도, 홍수도, 죽음도, 인류는 그렇게 길들였다. 측정은 인류가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은 거의 모든 것에 통했다. 거의. 그녀는 이제 측정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대상을 만났고, 그것은 하필 인류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상이었다. 평생 갈고닦은 단 하나의 도구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쓸수록 해로운 도구로 판명됐다. 목수가 평생 망치를 쥐었는데 세상이 못이 아니라 비눗방울이 된 격이었다. 두드릴수록 터지는. 그런데 이 현상 앞에서는, 측정이 통제의 첫걸음이 아니라 가속의 첫걸음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그녀가 평생 갈고닦은 도구가, 다가갈수록 대상을 밀어내는 도구였다. 가속 페달을 밟아 정지에 도달하려 한 승천파와, 그녀는 같은 오류의 반대쪽 끝에 있었다. 한쪽은 측정으로 재현하려 했고, 한쪽은 측정으로 저지하려 했다. 정반대 방향, 같은 벽.
그녀는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코르크보드의 곡선을 봤다. 1년 전에는 그것이 막아야 할 위협으로 보였다.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곡선은 위협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인류가 무거움을 얼마나 내려놓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위로 가는 그 선은, 비명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무엇의 그래프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아직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지 몰랐다. 다만 그것이 막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만은, 그 가을에 분명해졌다.
첫 깜빡임
D+303
이것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적을 언어가 내게 없다. 내 언어는 보험과 통계와 전파와 기계로 되어 있고, 오늘 일어난 일은 그 네 가지 어디에도 부품이 없다. 그래서 틀리게 적을 것이다. 틀린 줄 알면서 적는다. 안 적으면 더 빨리 잃을 테니까.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일주일을 먼저 적는다. 노자인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나는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완전히 놓았다. 놓으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 그건 또 노력이니까 — 그냥 놓아졌다. 측정이 닻이라는 걸 머리로 알았고, 그다음 손으로 받아들였고, 노자인의 30년을 듣고 나니, 더 쥐고 있을 힘이 없었다. 사람은 쥔 걸 의지로 놓지 못한다. 쥘 힘이 다 빠져야 놓는다. 내 힘은 그 주에 다 빠졌다.
그래서 그 주의 나는 이상하게 텅 비어 있었다. 슬프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아침에 상추에 물을 주고, 라디오를 만지고, 진주가 보내온 문자에 답하고, 이량의 일기를 분석 아닌 독서로 읽었다. 측정 항목이 없는 하루들. 그 비어 있음이 위험 신호인지 회복 신호인지 분류하려다, 분류 자체를 안 했다. 분류를 안 하는 날들이 쌓이고 있었다.
금요일이었다. 견습을 마치고 막차까지 시간이 떠서, 나는 걷기로 했다. 둘레길 말고, 어릴 때 형과 완행버스에서 내려 외할머니 댁까지 걷던 옛길. 지금은 거의 안 쓰는 농로다. 그 길의 한 지점에서, 아홉 살의 내가 처음으로 접시 안테나들을 정면으로 봤었다. 버스 창이 아니라 두 발로 선 채로. 그 자리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이유 없이 어딘가에 가는 일을, 요즘 한다.
길은 거의 그대로였다. 아스팔트가 한 번 덮였고, 전봇대가 새것으로 바뀌었지만, 길의 휘어짐과 산의 능선은 37년 전과 같았다. 아홉 살의 나는 형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손은 형을, 한 손은 보따리를 쥐고 이 길을 걸었다. 그때 형이 말했다. "저 접시들이 외계인 소리 듣는 거래." 나는 그 말을 믿었고, 며칠 뒤 그게 거짓말인 걸 알고 형과 싸웠다. 마흔여섯의 나는 그 접시가 정지궤도 위성과 교신하는 지구국 안테나라는 걸 알고, 형의 외계인설이 시(詩)였다는 것도 안다. 사실로는 형이 틀렸고, 다른 무엇으로는 형이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진주라면 이걸 한 문장으로 말할 텐데.
그 자리에 섰다. 산자락의 접시들이 정면으로 보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고, 흰 접시들이 노을을 한쪽 면으로 받고 있었다. 아홉 살 때처럼 목을 빼지 않았다. 그냥 봤다. 측정하지 않고, 분류하지 않고, 다음 항목도 없이. 그러자 이상하게, 아홉 살과 마흔여섯이 같은 자리에 겹쳐 섰다. 그때 본 것과 지금 보는 것 사이의 37년이 얇아졌다. 그 얇아짐이, 돌이켜보면, 시작이었다.
그리고 30초쯤, 세상이 한 겹 더 생겼다.
순서대로 적는다.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소리가 빠졌다. 바람도 새도 멀리 도로의 차도 다 있었는데, 그 소리들 사이의 간격이 사라졌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빈 데가 없어지고, 모든 소리가 한 번에, 그러나 시끄럽지 않게, 거기 있었다. 라디오의 빈 주파수에서 나던 그 쉭, 소리가 세상 전체로 번진 것 같았는데, 잡음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잡음의 안쪽이었다.
그다음 빛이 변했다. 이건 적기가 제일 어렵다. 색이 늘어난 게 아니다. 색과 색 사이가 보였다. 노을의 주황과 접시의 흰색 사이에, 원래 거기 있었는데 내 눈이 건너뛰던 무엇이 있었다. 목격자들이 비누방울이라고, 기름막이라고, 프리즘이라고 불렀던 것. 그들은 그것을 사물에 비유했는데, 내가 본 것은 사물이 아니었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였다. 접시가 산을 보고 있었다. 산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해 약간씩 기울어 있었고, 그 기울어짐이 빛으로 보였다. 노자인이 두 겹이라고 한 게 이거구나. 두 번째 겹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무게가 없었다. 몸이 가벼운 게 아니라, 무게라는 개념이 잠깐 적용되지 않았다. 6개월간 나를 누르던 것 — 빈 의자, 마른 칫솔, 세 문장짜리 통보서, 247이라는 숫자 — 그 전부가, 사라진 게 아니라, 무겁지 않았다. 거기 있는데 누르지 않았다. 슬픔이 없어진 게 아니라, 슬픔에 무게가 없었다. 이걸 평온이라고 부르면 너무 작다. 평온은 슬픔의 반대인데, 이건 슬픔을 포함한 채로 가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멀지 않은 곳에, 누가 있었다.
또렷하지 않았다. 사람 모양이 아니라, 사람이 있던 자리 같은 것. 그런데 나는 그게 누군지 알았다. 안다는 말도 틀리다. 그쪽도 나를 향해 기울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서로를 보는 세상에서, 가장 나를 보고 있는 한 점이 있었다. 그 점이 누군지 묻는 건, 이 빛 안에서는, 묻기도 전에 답인 종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끝났다.
무엇이 끝냈는지 안다. 내가 끝냈다. 그 한 점을 향해, 나도 모르게, 가까이 가려고 했다. 따라잡으려고. 18년치 본능이 튀어나왔다. 저기 있다, 확인됐다, 도달한다. 도달하려는 마음이 솟는 순간, 그게 마음이라는 걸 아는 순간, 두 번째 겹이 닫혔다. 색과 색 사이가 다시 메워지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간격이 돌아오고, 무게가 돌아왔다. 빈 의자의 무게, 마른 칫솔의 무게, 전부 한 번에.
나는 농로 한가운데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30초였는지 30분이었는지 모르겠다. 해는 그만큼 더 기울어 있었다. 무릎이 떨렸다. 주저앉지는 않았다. 18년차 손해사정사는 현장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그 자세가 우스웠다. 주저앉지 않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여기엔 보고할 현장도 없는데.
그날 밤 이량의 일기를 폈다. 일기 마지막 권, 글이 그림으로 바뀌던 그 부분. 동심원, 화살표, 사다리꼴 위의 접시. 일 년 전엔 그게 안테나 스케치인 줄로만 알았다. 오늘 다시 보니 다르게 보였다. 동심원은 접시가 아니라, 깜빡임 속에서 본 그것 —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 동심원처럼 겹쳐지던 그 결 — 의 도식이었다. 이량은 그걸 봤고, 글로 못 적어서 그림으로 남겼다. 나는 그걸 안테나로 분류하고 일 년을 보냈다. 같은 그림을, 보기 전과 본 후에 다르게 읽는다. 외운 색과 본 색은 다르다고, 노자인이 그랬다. 일기는 안 변했는데, 깜빡임을 한 번 겪은 눈이 그 그림을 다시 읽으니, 이량이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처음 보였다. 이량은 일 년 전에 이미, 내가 오늘 본 것을 그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걸 적는다. 적으면서 안다. 적는 행위가 그것을 밀어낸다는 걸. 이 글을 쓰는 손이 바로 그 닻이라는 걸. 측정의 역설을 알고도, 나는 적고 있다. 알아도 못 멈추는 게 닻의 정의다. 노자인의 연민처럼, 나의 이 기록벽처럼.
그날 본 것 중에 한 가지는, 일 년이 지나 지금 와서 더 또렷해진다. 그 한 점이 나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는 것. 첫 깜빡임 때 나는 그걸 내가 본 것으로만 여겼다. 내가 거기 가서, 내가 봤다고. 그런데 본다는 게 일방향이 아니었다. 그쪽도 나를 향해 있었다. 보는 일은 마주 보는 일이었다. 일 년 전 둘레길 벤치에서 이량이 이쪽을 향해 앉아 있던 것처럼, 그 한 점도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길에 선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쪽이 향하고 있어서, 내가 그리로 이끌린 것인지도. 이건 측정 안 된다. 그래서 그때는 안 적었다. 지금 적는 건, 이제 그게 추적의 언어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마주 봄에는 쫓음이 없다. 마주 봄은 그냥, 양쪽이 같은 방향을 가진 상태다.
그러나 하나는 측정이 아니라 사실로 적을 수 있다. 문은 열려 있었다. 30초간, 어릴 적 그 길에서, 문이 열렸고 나는 문턱까지 갔다. 못 건넌 이유는 문이 잠겨서가 아니다. 내가 손잡이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잡으려는 손이 문을 닫는 문. 그런 문이 세상에 있다는 걸, 오늘 두 발로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 문 너머에, 나를 향해 기울어 있던 한 점. 그게 누구였는지는 적지 않는다. 적으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되면 또 따라잡고 싶어진다. 따라잡고 싶어지면 문이 닫힌다. 그래서 안 적는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비워 둔다. 노자인의 결론란처럼. 비워 두는 것이 오늘은 채우는 것이다.
밤새 한 가지와 싸웠다. 직업병이 가만있지 않았다. 이걸 검증해야 한다는 충동. 그게 환각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뇌의 산소 부족, 노을빛의 착시, 일주일간 누적된 수면 부족. 반증 가설이 줄을 섰다. 18년치 회의주의가, 자기가 본 것조차 의심하라고 했다.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가, 닫았다. 검증하려는 순간 그게 닻이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검증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달라질 게 없다는 것. 환각이라고 증명되면 나는 안심하고 이쪽에 남을 것이고, 진짜라고 증명할 방법은 애초에 없다. 규칙은 단순하다. 측정 가능한 것만 측정으로 안다. 이건 측정 가능한 게 아니다. 그러니 안다, 모른다의 문제가 아니라, 산다, 안 산다의 문제다. 나는 노트북을 서랍에 넣었다.
이튿날 금산에 가서 노자인에게 한 마디만 했다. 어제 그 길에서, 잠깐, 두 겹을 봤습니다. 노자인은 인두를 내려놓지도 않고,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닫았지?" 닫혔습니다. "자네가 닫은 거야. 문이 닫힌 게 아니라." 압니다. "알면 됐네." 그는 다시 라디오로 돌아갔다. 30년 경계인의 축하 인사는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 무뚝뚝함이, 오늘 들은 어떤 말보다 정확한 위로였다. 그는 내가 첫 문턱을 밟은 걸 알았고, 동시에 그게 시작일 뿐 끝이 한참 멀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호들갑 떨지 않았다. 첫 깜빡임에 호들갑을 떨면, 그게 또 따라잡고 싶은 마음이 된다. 노자인은 30년 전에 그걸 배웠을 것이다. 아마, 호들갑을 떨어본 뒤에.
둘레길
D+317
두 번째 깜빡임이 왔다. 첫 번째보다 길었고, 이번엔 이량을 봤다. 이 두 문장을 적는 데 사흘이 걸렸다. 적으면 잃을까 봐. 그런데 안 적으면 더 빨리 잃는다는 걸 첫 번째 때 배웠으므로, 적는다. 잃는 속도가 느린 쪽을 택한다.
첫 깜빡임 이후 2주가 지나 있었다. 그 2주 동안 나는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다시 그 농로에 가서 같은 일을 일으키려 해본 것. 안 됐다. 일으키려 하니까 안 됐다. 두 번째 겹은 일으키려는 자에게는 절대 안 열린다. 그걸 확인하고, 나는 일으키려는 시도를 그만뒀다. 이게 두 번째로 한 일이다. 그만두는 것. 그만두는 일은 매번 처음처럼 어렵다. 한 번 그만뒀다고 다음에 쉬운 게 아니다. 닻은 잘라도 다시 자란다.
그사이 형에게서 몇 번 전화가 왔다. 진주 일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적는다. 오늘은 둘레길 이야기만 적기로 한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요즘 내가 배운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장소는 둘레길 그 벤치였다. 이량이 매주 앉던, 왼쪽으로 닳은, 신발 자국이 한 자리에 다져진 그 벤치. 나는 그동안 거기 앉을 때마다 오른쪽에 앉았다. 이량의 자리를 비워두는 습관. 그날도 오른쪽에 앉아 접시들을 봤다. 견습도 실험도 없이, 그냥. 첫 깜빡임 이후로 나는 그냥 보는 일에 조금 익숙해졌다.
그날 따라간 게 하나 있었다. 이량의 미완성 라디오. 전에 받아 와 아직 콘덴서를 안 간 그것. 요즘 어디 갈 때 그걸 가방에 넣는 버릇이 생겼다. 부적 같은 거라고 적으면 신비주의 어휘에 가까우니, 그냥 습관이라고 적는다. 벤치 옆에 가방을 놓았고, 가방 안에 라디오가 있었고, 나는 그걸 의식하지 않으려다 의식했다.
해가 접시 뒤로 넘어가던 참이었다. 첫 번째 때처럼, 소리들 사이의 간격이 먼저 사라졌다.
두 번째 겹이 열렸을 때, 이번엔 더 천천히 열렸다. 첫 번째가 문이 갑자기 열린 거라면, 이번엔 눈이 어둠에 익듯 서서히 열렸다. 색과 색 사이가 다시 보였다. 사물들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기울어짐의 한가운데, 벤치의 왼쪽 자리에, 이량이 있었다.
이번엔 또렷했다. 사람이 있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이량이 거기 앉아 있었다. 내가 늘 비워두던 그 왼쪽 자리에. 왼손잡이의 자세로, 왼쪽으로 살짝 기운 채로. 18년간 옆에서 보던 그 옆모습으로.
이량은 접시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매주 금요일, 둘레길 같은 자리에서, 떠난 쪽에서, 남은 쪽을 향해. 6개월간 나는 이량이 어디로 갔는지를 쫓았다. 어디로 갔느냐가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량은 가서, 거기서, 이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떠난 게 아니라 돌아앉은 거였다. 그리고 그 자세는, 한 번이 아니라, 늘 그래왔다는 자세였다. 닳은 신발 자국처럼, 반복된 자세.
말을 걸었다. 입으로 걸었는지 마음으로 걸었는지 모르겠다. 이량아. 소리는 닿지 않았다. 노자인이 말한 그대로였다. 거긴 말이 안 닿는다. 이량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들은 게 아니라, 말이라는 형식이 그 겹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유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 유리라면 두드리기라도 한다. 그게 아니라, 말이 도착할 공기 자체가 다른 밀도였다.
그런데 이량은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말 대신. 그냥, 거기 있었다. 나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떠나지도 않고.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 기다림은 무언가를 바라는 거니까 정확하지 않다. 바람이 없는 기다림. 도착을 재촉하지 않는 마중. 이량은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게 아니라, 내가 올 수 있는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 주는 거였다. 문턱을 지키는 사람처럼. 등대처럼. 아니, 등대는 부른다. 이건 부르지도 않았다. 부르면 내가 따라잡으려 할 테니까. 그걸 아는 마중이었다.
이번엔 내가 닫지 않았다. 따라잡으려는 마음이 안 솟았다고는 못 한다. 솟았다. 그런데 첫 번째 때와 달랐다. 이량이 거기 있다는 걸, 가서가 아니라 여기서도 알 수 있다는 게, 솟는 마음을 눌렀다. 따라잡지 않아도 거기 있다. 그러니 따라잡을 이유가 한 칸 줄었다. 한 칸 줄어든 자리에서, 깜빡임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닫혔다. 이번엔 내 손이 닫은 것도, 누가 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해가 다 넘어가듯, 닫혔다. 두 번째 겹이 첫 번째 겹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벤치 왼쪽이 다시 비었다. 빈 벤치를 보는데, 첫 번째 때처럼 무릎이 떨리지는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슬픈데, 그 슬픔에 6개월 전 같은 절망이 없었다. 이량은 갔는데,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 두 문장이 모순이 아니라는 걸, 그날 벤치에서 처음으로 몸으로 알았다.
한 가지 더 있었다. 깜빡임이 닫히기 직전, 이량의 손을 봤다. 왼손. 무릎 위에 놓인 그 손이,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작은 것을 만지는 손.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닫히고 나서 알았다. 라디오를 만지는 손이었다. 부품을 집는, 다이얼을 돌리는, 그 손. 이량은 거기서도 라디오를 만지고 있었다. 이쪽에서 배우던 그 일을, 저쪽에서도. 고치는 게 아니라 듣는 거였다던, 그 일을.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날 밤새 생각했고, 의미를 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하면 데이터가 되니까. 다만 가방 속 미완성 라디오를 꺼내 작업대에 올려뒀다. 콘덴서는 여전히 안 갈았다. 이량이 저쪽에서 만지는 손과, 내 작업대 위의 그 라디오가, 어떤 식으로든 같은 물건이라는 느낌. 느낌은 데이터가 아니다. 그래서 비고에도 안 적고, 그냥 라디오를 작업대 한가운데에 뒀다. 언젠가 갈게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아니고.
집에 와서 이걸 적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안 적는다. 이량의 얼굴, 표정, 그날의 빛. 적으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내가 또 분석하고 따라잡으려 들 테니까. 다만 하나는 적어도 된다. 그건 따라잡고 싶은 마음을 안 키우니까.
떠난 쪽에도 기다림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다림이 아닌 마중이. 나는 6개월간, 일방적으로 쫓는 줄 알았다. 한쪽이 가고 한쪽이 쫓는 구도. 그게 아니었다. 이량은 가서, 매주, 그 자리에 돌아앉아 있었다. 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추적이 아니었다. 양쪽에서 마주 앉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모르고 6개월을 한쪽 방향으로만 뛰었다.
이 발견이 무엇을 바꾸는지도 적어둔다. 6개월간 내 동력은 죄책감이었다. 이량의 변화를 우울로 오분류했다는 죄책감. 못 알아본 죄, 못 따라간 죄. 죄책감은 좋은 연료다. 오래 타고, 뜨겁다. 그런데 둘레길의 마중을 보고 나니, 그 연료가 조금 식었다. 이량은 나를 원망하러 거기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추궁하러도, 재촉하러도 아니었다.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망이 없는 자리에서는 죄책감도 연료가 못 된다. 연료가 식으면 추진력이 준다. 추진력이 줄어야 멈출 수 있고, 멈춰야 건너간다. 죄책감을 내려놓는 것조차, 결국 닻 하나를 더 자르는 일이었다. 이량은 그걸 알고, 원망 없이 앉아 있었다.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의 닻을 풀어주는 방식. 마중은 그런 일이었다.
그날 밤, 6개월 전에 분류했던 것 하나를 정정한다. 나는 이량의 음성메모를 처음 들었을 때, 마지막 메모의 1분 49초 침묵을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큰 것' 사이에서 판정 못 했다. 오늘 안다. 둘 다 아니었다. 그건 말을 그만두는 연습이었다. 이량은 떠나기 전에, 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기 전에, 말없이 거기 있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마중의 예행.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현존이었다. 18년차 사정사가 6개월간 못 푼 1분 49초를, 둘레길 벤치가 한 번의 깜빡임으로 풀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량이 왜 하필 매주 금요일, 같은 자리였는지. 나는 그게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약속이었다. 누구와의 약속인지는 그때의 이량도 몰랐을 것이다. 그냥, 누군가 언젠가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자리를 데워두는 일. 진공관이 데워지듯, 자리도 데워둬야 누가 앉을 수 있다. 이량은 2년간 이 벤치를 데웠다. 그리고 떠난 뒤에도, 데우고 있다. 나는 그 데워진 자리에 오른쪽으로 비켜 앉아, 6개월을 보냈다.
두 번째 깜빡임이 첫 번째와 다른 점을 하나 더 적는다. 첫 번째 때 나는 무서웠다. 통제 못 하는 일이 내 몸에 일어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검증하려 했고,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두 번째 때는 안 무서웠다. 같은 일이, 한 번 겪으니, 무섭지 않았다. 진주가 학교에서 30초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처럼. 무섭지 않은 것과 익숙한 것은 다르다. 익숙해진 게 아니다. 깜빡임은 매번 처음처럼 낯설다. 다만 그 낯섦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낯선 걸 무서워하는 건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통제를 내려놓으니, 낯섦이 무섭지 않고 그냥 낯설었다. 무섭지 않은 낯섦. 그게 이량이 마지막 몇 달 살던 상태였을 것이다. 음성메모의 목소리가 점점 평온해지던, 그 상태.
노자인에게는 이번엔 아무 말도 안 했다. 말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면 또 사건이 되니까. 대신 그날 견습 시간에, 라디오를 평소보다 오래 만졌다. 노자인이 한 번 봤고, 아무것도 안 물었다. 그도 둘레길에 자기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30년째 알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같은 종류의 마중을 받는 두 남자였고, 그날은 그걸로 충분했다.
진주
D+325
형에게서 새벽에 전화가 왔다. 새벽 전화는 18년간 죽음의 시간이었는데, 이번엔 죽음이 아니라 입원이었다. 진주를 폐쇄병동에 넣기로 했다고. 다음 주에 입원시킨다고. 통보였다. 의논이 아니었다. 형은 의논하려고 새벽에 전화하지 않는다. 결정한 다음에 전화한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다.
자초지종을 들었다. 진주가 학교에서 쓰러졌다. 정확히는 쓰러진 게 아니라, 수업 중에 30초쯤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눈을 뜬 채로, 창밖을 보면서, 부르는 소리에 답을 안 했다고. 교사가 응급실에 보냈고, 검사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왔다. 뇌파 정상, 영상 정상. 그런데 진주가 깨어나서 한 말이 문제였다. "잠깐 다른 데가 보였어요." 그 한 마디로 진료과가 바뀌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안다. 깜빡임이다. 30초. 내 첫 번째와 같은 길이. 진주는 농로도 둘레길도 아닌, 학교 교실에서, 분석도 수행도 없이, 그냥 건너편을 봤다. 나는 6개월을 측정하고도 30초 봤는데, 진주는 열일곱 해를 그냥 살고 30초 봤다. 전에 적은 그 문장이 회수된다. 걸어온 자와 처음부터 거기 있던 자.
형은 그것을 발작으로 분류했다. 의사는 '해리성 삽화 의증'이라고 적었다. 둘 다 틀린 분류라는 걸 나는 아는데, 내 분류('전이의 이행기 징후')는 진단서에 적을 수 없는 종류다. 측정 가능한 명제가 아니니까. 진주의 진짜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는 이 세계의 어느 진료과에도 없다. 그래서 진주는 가장 가까운 칸에 분류된다. 정신질환. 칸이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은, 늘 가장 가까운 칸의 이름으로 불린다. 나는 그걸 직업으로 18년 했다. 칸이 없는 사건을 가장 가까운 칸에 넣었다. 그게 분류였다. 오늘 내 조카가 그 분류의 대상이 됐다.
병원 기록을 형에게 받아 봤다. 직업병으로 정독했다. 검사 수치는 전부 정상 범위였다. 정상인데 입원이 권고된 이유는 단 하나, 진주의 진술이었다. "다른 데가 보였다." 환자가 본 것을 의사가 못 보면, 못 본 쪽이 기준이 되고 본 쪽이 증상이 된다. 이건 의료의 잘못이 아니다. 의료의 구조다. 다수가 못 보는 것을 한 사람이 보면, 통계적으로 그 한 사람을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다. 합리가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진주의 진단서에서 봤다. 규칙 3. 저쪽의 진술은 이쪽의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되면서 증상이 된다. 정보는 전달되지 않는다. 진주가 본 것은 진주 안에 갇히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병명이 된다.
이게 이량에게도 일어났을 일이다. 만약 이량이 떠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다른 데가 보인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우울증 소견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이량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음성메모에만 남겼다. 청자를 특정하지 않는 혼잣말로. 이제 알겠다. 이량이 왜 메모로만 말했는지. 말하면 분류당하니까. 분류당하면 입원당하니까. 이량은 자기를 지키려고 침묵한 게 아니라, 자기가 본 것을 지키려고 침묵한 거다. 진주는 침묵하는 법을 아직 모른다. 열일곱이니까. 그래서 위험하다.
형 집에 갔다. 진주는 자기 방에 있었고, 거실에서 형, 형수와 마주 앉았다.
"입원은 안 돼." 내가 말했다. 형에게 반말로, 짧게. 화가 나면 짧아진다.
"네가 뭘 알아." 형도 짧았다. 우리 형제가 화났을 때의 대화는 늘 짧다. "의사가 위험하다잖아. 더 심해지면 어쩔 거야."
"심해지는 게 아니야. 진주는 아픈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멀쩡한 애가 수업 중에 30초씩 넋이 나가는 게 정상이야?"
나는 대답을 골랐다. 여기서 전이를, 깜빡임을, 두 겹의 세상을 말하면, 나도 같이 입원시킬 명단에 오른다. 형의 세계에서 그건 미친 소리다. 그리고 형의 세계가 틀린 것도 아니다. 형은 자기 딸을 지키려는 거다. 못 보는 게 죄는 아니다. 나도 6개월 전엔 못 봤다.
"형." 내가 말했다. "내가 이량을 뭘로 분류했는지 알아? 우울증. 6개월간 병원 데려가려고 했어. 이량은 안 아팠는데. 나는 못 알아봤고, 그걸로 평생 가는 거 하나 만들었어." 형이 입을 다물었다. 이량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 무기다. 안 쓰려고 했는데 썼다. 쓴 걸 후회하지만 주워 담지는 않는다.
"진주가 보는 거." 내가 이었다. "나는 증명 못 해. 측정도 못 하고, 진단서에도 못 적어. 근데 형, 증명이 안 되는 거랑 없는 거는 달라. 우리가 못 보는 게 한두 개냐. 못 본다고 다 병으로 만들면,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두라고? 더 깊이 빠지게?"
"빠지는 게 아니라고." 나는 거기서 목소리를 낮췄다. 높이면 형이 방어한다. "형, 진주 표정 봤어? 무서워하는 표정이야, 아니면 다른 표정이야."
형이 멈췄다. 형도 봤을 것이다. 진주가 그 30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거기서 끌려 나올 때 아쉬워한다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은 병이 맞다. 아쉬워하는 사람은, 다른 거다. 형은 그 차이를 봤지만, 그 차이를 받아들이면 자기 세계가 흔들리니까, 안 본 걸로 하고 있었다. 6개월 전 내가 이량에게 한 그대로.
진주 방에 들어갔다. 진주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 뭐가 보이냐고 안 물었다. 대신 옆에 앉았다.
"삼촌, 나 미친 거 아니지?" 진주가 물었다. 처음으로 진주가 불안해 보였다. 자기가 본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자기를 보는 눈이 무서운 거였다.
"안 미쳤어." 내가 말했다. "너는 일찍 보는 거야. 남들보다 일찍."
"근데 왜 다 나보고 아프대."
"칸이 그것밖에 없어서. 사람들은 모르는 걸 보면, 제일 가까운 아는 칸에 넣어. 그게 편하거든. 네가 든 칸 이름이 하필 병이라서 그래. 너 때문이 아니야."
진주가 한참 창밖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삼촌도 봤지."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진주가 살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보드가 시 같아졌을 때부터."
그 밤에 나는 결정을 했다. 6개월간 나는 분석만 했다. 데이터를 모으고, 가설을 세우고, 판정을 내렸다.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개입은 사정사의 금기다. 사정사는 사건에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면 객관성을 잃으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진주의 입원을 막는 일에. 이건 분석이 아니다. 편들기다. 한쪽 편에 서는 일. 18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에 섰다.
이게 닻이라는 걸 안다. 진주를 지키려는 마음, 형과 싸우는 일, 이 세계의 일에 손을 담그는 것. 전부 나를 이쪽에 더 단단히 묶는 일이다. 둘레길에서 한 칸 풀린 닻이, 오늘 두 칸 다시 감겼다. 그런데 노자인이 그랬다. 닻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연민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진주를 지키는 일이 나를 못 떠나게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 묶이겠다.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게 가끔 있다. 노자인이 30년간 그걸 증명했다. 나는 오늘 그 줄에 한 명 더 섰다.
입원은 보류됐다. 형이 동의해서가 아니다. 내가 진주를 당분간 데리고 있기로 해서다. 형은 마지못해, 한 달, 이라고 했다. 한 달 안에 안 나아지면 입원이라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한 달 안에 나아질 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나아질 병이 아니라 나아질 필요가 없는 상태라는 걸, 한 달 안에 형에게 보여줄 방법은 없다. 다만 한 달을 벌었다. 진주에게 한 달은, 어쩌면, 노자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주말에 진주를 데리고 금산에 갔다. 노자인에게 진주의 상황을 말했다. 학교에서 30초, 다른 데가 보였다는 것, 입원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노자인은 다 듣고, 진주에게 물었다. 보이스시트대로, 진주에게는 부드러운 말투로. "학생, 무섭던가." 진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어요." 노자인이 말했다. 그러고는 진주에게 고장 난 라디오를 하나 줬다. "이거 무서워하지 말고 뜯어봐요. 안에 든 게 다 보일 거예요." 진주가 라디오를 받아 들고 작업대로 갔다.
노자인이 나를 따로 불렀다. 낮게 말했다. "저 학생은 자네보다 빨라. 자네는 30년 걸린 길을 반년에 왔고, 저 애는 그냥 거기 있어. 위험한 건, 빠른 게 아니라, 빠른 걸 둘러싼 사람들이야." 그러고는 평소답지 않게 한 마디 더 했다. 세 문장 넘기는 일이 드문 노인이. "지켜주게. 나는 내 사람을 못 지켰어. 그땐 지키는 게 보내는 건지 잡는 건지 몰라서." 그는 거기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끊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후회 비슷한 걸 흘린 거였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들은 척하면 그가 민망할 테니까.
돌아오는 버스에서 진주가 잠들었다. 접시들이 나타나는 모퉁이에서도 안 깼다. 나는 진주 대신 접시들을 봤다. 한 달. 형은 한 달 안에 진주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나는 한 달 안에 진주가 자기를 지키는 법 — 침묵하는 법, 아닌 척하는 법 — 을 배우기를 바란다. 슬픈 목표다. 본 것을 못 본 척해야 안전한 세계에서, 열일곱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게 보호라니. 그런데 이량은 그 거짓말을 못 배워서, 아니 안 배워서,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혼자 건너갔다. 진주는 다르게 하고 싶다. 말해도 안전한 한 사람이, 곁에 있게. 그 한 사람이 6개월 전엔 없었고, 지금은 내가 그 자리에 앉는다. 18년간 가운데 앉던 사람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는다.
시계
취리히 — 같은 해 겨울
안톤 베르거가 건너간 날, 헤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겨울 베르거는 거의 출근하지 않았다. 정년을 두 번 미룬 사람이 조용히 출근을 미뤘고,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헤스만 가끔 그의 집에 들렀다. 그는 점점 적게 말했고, 점점 오래 창밖을 봤고, 점점 가벼워 보였다. 살이 빠진 게 아니었다. 무게가 빠진 거였다. 헤스는 자기 모델의 변수로 그를 읽지 않으려 애썼지만, 안 읽을 수가 없었다. 변수 A부터 D까지 전부 켜져 있었다. 그녀는 한 사람이 곡선의 한 점이 되어가는 과정을, 처음으로 데이터가 아니라 의자 맞은편에서 봤다.
그 겨울 그들은 전보다 더 자주 만났다. 베르거는 헤스에게 자기 일을 조금씩 넘겼다. 40년 치 인구 데이터셋, 그가 직접 손으로 보정한 표들, 어느 것도 설명서가 없어서 그가 옆에 있어야만 읽히는 자료들. 인수인계라기보다 유언 같았다. 한번은 그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책상에서 치웠다. 젊은 시절의 그와, 그가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여자. "아내였어. 오래전에 갔지. 그때는 그냥 떠난 줄 알았어.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게 첫 케이스였을지도 몰라. 시신이 없었거든." 그는 그 말을 데이터를 읽듯 건조하게 했다. "평생 인구를 세면서, 정작 내 인구 하나가 어떻게 빠졌는지는 몰랐던 거지." 헤스는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결측치를 가진 채로, 같은 곡선을 마흔 해와 열다섯 해씩 들여다본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베르거가 왜 그 곡선 앞에서 농담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그에게도 그 곡선 위에 점이 하나 있었다.
그날 그녀는 그의 부탁으로 들렀다. 정리한 데이터셋을 회사에 인계해달라는, 사무적인 부탁이었다. 그는 거실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는 그가 더는 차지 않는 손목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별말을 안 했다. 베르거는 창밖의 나무를 봤고, 헤스는 그를 봤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모니카, 자네 곡선 말이야. 그게 틀리길 바란다고 했었지."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안 틀렸어. 그런데 자네가 그 곡선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틀렸어. 그건 사라지는 사람의 수가 아니야."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작아진다는 걸 아는 사람의 멈춤이었다.
그다음은 빠르고 조용했다. 베르거의 윤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헤스가 평생 어느 보고서에서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여러 색으로 일렁였다. 비누막 같기도 하고 기름막 같기도 한, 광학적으로는 동일하다던 그 일렁임. 6백 건의 목격 진술이 같은 단어로 수렴했던 그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눈으로 봤다. 측정하는 사람이 평생 처음, 재지 않고, 그냥 봤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닿지 않을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가 가는 곳의 밀도에서는, 그녀의 말이 그녀의 프레임 안에서만 울릴 것이었다.
그리고 의자가 비었다. 베르거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졸업한 거였다. 의자에는 그가 입고 있던 카디건이 무게 없이 접혀 있었고, 책상에는 시계가 그대로 있었다. 시계는 멈춰 있지 않았다. 여전히 가고 있었다. 시간을 보는 사람은 떠났는데,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다. 헤스는 그 시계를 한참 봤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왜 넣었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것은 그녀의 모델로 설명되지 않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효용이 0인데, 전부를 건 행동. 그녀의 모델에서 모든 행위는 효용을 가져야 했고, 효용 없는 행위는 잡음이었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잡음 쪽을 골랐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녀는 베르거의 빈 거실을 정리했다. 그에게는 정리해줄 가족이 없었다. 책장에는 인구통계학 고전들이 연도순으로 꽂혀 있었고, 책상 서랍에는 40년 치 메모가 있었다. 메모의 마지막 묶음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한 장이 있었다. 거기엔 숫자가 아니라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곡선은 끝을 그릴 수 있다. 끝 다음은 못 그린다. 그래서 나는 그래프를 그만 본다." 헤스는 그 종이를 접어 시계와 같은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평생 신뢰한 도구의 한계를, 그 도구를 가장 오래 쓴 사람이 마지막에 적어 두고 갔다. 모델은 끝을 그릴 수 있어도 끝 다음을 그리지 못한다. 그녀의 곡선이 가리키는 그 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그래프도 말해주지 않았다. 베르거는 그 너머로 걸어 들어갔고, 그녀는 그래프 이쪽에 남아 그가 사라진 의자를 봤다.
베르거의 죽음은 —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데이터로 잡히지 않았다. 시신이 없으니 사망 신고가 안 됐고, 사망 신고가 없으니 통계에 안 잡혔다. 그는 헤스의 곡선 위의 한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녀가 평생 그린 곡선은 신고된 실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베르거는 신고할 가족도 없었다. 가장 가까이서 본 한 건의 전이가, 그녀의 데이터셋에는 영영 안 들어간다. 그녀는 그제야, 자기 곡선이 실제 곡선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곡선 바깥에, 곡선에 안 잡히는 무수한 베르거들이 있었다. 측정은 늘 측정되는 것만 본다.
그 주에 헤스는 그룹에 사직서를 냈다.
레나테 폴이 그녀를 불렀다. 폴의 책상에는 여전히 손주 사진이 있었다. "지금 나가면 안 돼요." 폴이 말했다. "우리는 막 진전을 보고 있어요. 새 약물의 2상이 곧……" 헤스가 말을 끊었다. 그녀가 폴의 말을 끊은 것은 처음이었다. "폴, 우리가 막을수록 그들은 더 빨리 가요. 우리가 재는 순간 그들은 가속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곡선을 위로 밀어요. 우리는 강을 막는 둑이 아니에요. 우리는 강에 던지는 돌이에요. 던질수록 물이 더 튀는." 폴은 오래 침묵했다. 그러고는 손주 사진을 한 번 보고 말했다. "그래도 던져야 해요. 아무것도 안 하느니. 그 애가 살 세계를 위해서." 헤스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폴이 옳은 자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폴은 남는 자들의 변호인이었고, 남는 자들은 정말로 존재했고,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무거운 손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것이 헤스의 손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재는 사람으로 남을 수 없었다.
"저는 평생 위험에 가격을 매겼어요." 헤스가 말했다. "그런데 이건 위험이 아니에요. 가격을 매길수록 우리가 매기려는 것이 멀어져요. 저는 제 도구가 망가뜨리는 걸 더는 못 보겠어요." 폴은 사직서를 받았다. 두 사람은 악수했다. 적이 아니었다. 같은 곡선을 보고 다른 동사를 고른 두 사람이었다. 나가는 길에 헤스는 포겔과 마주쳤다. 그는 그녀가 그만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짧게 말했다. "감상에 빠지셨군요." 헤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녀는 한 가지를 알았다. 포겔의 시스템은 점점 정교해질 것이고, 점점 많은 평온을 헝클어뜨릴 것이고, 그래도 단 한 명도 붙잡지 못할 것이다. 정교한 실패가 엉성한 실패보다 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녀는 그 정교함에 더는 손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게 감상이라면, 그녀는 감상 쪽을 골랐다. 평생 처음으로.
헤스는 코르크보드의 곡선을 떼어냈다. 1년 넘게 핀으로 꽂혀 있던 외삽 그래프. 떼어낸 자리에 압정 자국 네 개가 남았다. 그녀는 그래프를 버리지 않고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곡선이 틀려서가 아니라, 곡선을 부르던 이름이 틀려서. 그리고 그 옆에 베르거의 시계를 넣었다. 여전히 가고 있는 시계. 서랍을 닫으며,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그만뒀는지 정확히 알았다. 재는 일. 막는 일. 평생의 직업.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시작했는지는 몰랐다. 시작한 게 있긴 한 건지도. 그녀는 둑에서 내려왔지만, 강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강가에 서 있었다. 발은 마른 채로.
강 팀장의 선택
D+334
강 팀장이 다시 왔다. 이번엔 USB가 아니라 결심을 들고. 결심은 손에 안 들리는데, 이 사람은 결심을 들고 다니는 게 보인다. 어깨에 들려 있었다.
그는 전면 공개를 하겠다고 했다. 5년간 묻혀 있던 실제 통계, 공표치와 체감치의 3배 격차, 은폐의 경위, 그리고 USB에 있던 정부 전이 유도 연구의 전원 실패 기록까지. 언론사 두 곳과 국제 채널 하나에 동시에 넘기겠다고. 다음 주에.
진주가 우리 집에 온 지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진주는 그사이 학교를 쉬고 우리 집에서 지냈다. 아침에 상추에 물을 주고, 라디오를 뜯고, 가끔 30초씩 창밖을 봤다. 나는 그 30초를 세지 않았다. 세면 형이 묻는 횟수와 같아지니까. 진주는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자기 30초를 숨기지 않아도 됐다. 그게 한 달을 번 첫 효용이었다. 강 팀장이 온 건 그런 아침이었다.
"왜 지금입니까." 내가 물었다.
"막간이 끝났거든요." 그가 말했다. 막간이라는 단어를 그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뜻은 통했다. "전이율 격차 표가 유출됐잖아요. 우리나라 추정치가 공표치의 세 배로, 국제 문서에 박혀서 돌아왔어요. 제가 5년간 결재 올린 그 숫자가, 밖에서 먼저 확인됐습니다. 안에서 5년을 못 뚫은 게 밖에서 하루 만에 떴어요." 그는 쓰게 웃었다. "이제 은폐가 은폐도 아니에요. 다 아는 걸 안 밝히는 거니까. 그럼 밝히는 게 차라리 나아요."
행정 문어체가 사라져 있었다. 막간5 이후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됐다. 수동태가 빠지고, 주어가 돌아왔다. "제가 밝히겠습니다." 5개월 전 국밥집에서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하던 사람이, 이제 "제가"로 문장을 시작한다. 화법의 변화가 곧 사람의 변화라는 걸, 18년간 진술을 들어온 나는 안다. 진짜로 결심한 사람은 문법부터 바뀐다.
그가 마지막 검증을 부탁했다. 자기가 공개할 데이터에 구멍이 없는지, 사정사의 눈으로 봐달라고. 나는 봤다. 직업적으로 꼼꼼히. 통계의 정합성, 추정의 근거, 반박 가능한 지점. 데이터는 단단했다. 5년간 혼자 다듬은 데이터답게.
검증하면서 한 가지 물었다. 공개하면 본인은 어떻게 되느냐고. 강 팀장은 담담했다. 공무원이 직무상 알게 된 비공개 통계를 무단으로 언론에 넘기면, 징계는 기본이고 형사 문제까지 갈 수 있다. 그는 그걸 다 계산해뒀다. "사표는 미리 써놨어요. 그게 제일 가벼운 처분일 거고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5년을 안에서 뚫으려고 했어요. 정식 보고, 재보고, 이의신청. 다 막혔죠. 안에서 안 되면 밖에서 하는 수밖에요. 깨끗하게 하긴 글렀고, 효과적으로라도 하려고요." 행정의 인간이 행정을 배신하기로 한 것이다. 배신이 충성보다 윤리적인 순간이 있다는 걸, 그는 5년 걸려 알았다.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말릴 자격이 없었다. 나도 회사 권한 밖 데이터를 열람한 사람이고, 우리는 같은 종류의 규정 위반자였다. 다른 점은, 나는 아내를 위해서였고, 그는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것. 그쪽이 더 큰 사랑이다. 얼굴도 모르는 한 명을 위해 직장을 거는 건, 아는 한 명을 위해 거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그에게 내 의견을 말했다. 이게 오늘 로그의 핵심이다.
"팀장님. 데이터는 단단합니다. 그런데 공개하셔도, 세상은 안 바뀝니다."
그가 나를 봤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 말 들어보세요." 내가 이었다. "이 데이터가 공개되면, 일주일간 난리가 날 겁니다. 헤드라인, 토론, 음모론. 그리고 일주일 뒤에, 사람들은 이걸 자기가 원래 믿던 이야기 속에 넣을 거예요. 휴거를 믿던 사람은 휴거의 증거로, 정부 음모를 믿던 사람은 음모의 증거로, 아무것도 안 믿던 사람은 또 하나의 가짜뉴스로. 새 데이터는 기존 결론을 안 바꿔요. 제가 6개월간 그걸 봤습니다. 휴스턴 영상 때도, 깜빡임 목격담 때도. 사람들은 증거를 보고 생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증거를 자기 생각 속의 소품으로 바꿉니다."
"그럼 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요." 나는 거기서 멈췄다가 말했다. "하시라는 겁니다. 다만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는 마세요. 세상은 자기 언어로 이걸 소화할 거고, 소화되면 음모론 하나 늘어나는 걸로 끝납니다."
"그런데 왜 하라는 겁니까."
"한 사람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이 데이터가 만 명에게 가면, 9천9백99명은 자기 이야기 속에 넣고 잊을 거예요. 그런데 한 명은, 딱 한 명은, 이게 균열이 될 수 있어요. 자기가 믿던 이야기에 안 들어가는 데이터를 만나면, 보통은 데이터를 버리는데, 아주 드물게, 이야기 쪽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한 명한테는, 이 공개가 문이 됩니다. 팀장님은 만 명한테 가짜뉴스를 주는 게 아니라, 한 명한테 문을 주는 거예요. 그 한 명이 누군지는 모르고요. 알 수도 없고요."
"확률이 만 분의 일이면, 너무 낮지 않습니까." 강 팀장이 물었다. 계리(計理)의 인간다운 질문이었다.
"낮죠." 내가 말했다. "그런데 만 명한테 가면 한 명이고, 백만 명한테 가면 백 명이에요. 균열은 비율로 안 늘어나요. 절대 수로 늘어요. 그리고 균열 하나가 또 다른 균열을 만들거든요. 그 한 명이 건너가면, 남은 세계에 또 균열을 남겨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저도 다 몰라요. 다만 봤습니다. 균열은 전염됩니다. 데이터보다 느리지만, 망각보다는 끈질기게."
강 팀장은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 계리사에게 '비율이 아니라 절대 수'라는 말은 익숙한데, '균열이 전염된다'는 말은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5년간 숫자를 본 사람은, 숫자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는 것도 안다.
강 팀장이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사정사님은, 그 한 명을 본 적 있습니까."
나는 이량을 생각했다. 노자인을 생각했다. 진주를 생각했다. 그리고 6개월 전의 나를 생각했다. 그 한 명들. 데이터가 균열이 됐던 사람들.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중 하나가 접니다."
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기 전에 그가 한 말. "저는요, 사정사님. 평생 숫자를 세기만 했어요. 세는 게 제 일이었고, 세는 걸로 끝이었죠. 이번에 처음으로, 센 걸 누구한테 줍니다. 주는 건 세는 거랑 달라요. 주면, 제 손을 떠나요." 그는 문 앞에서 돌아봤다. "떠나는 게, 무서운데, 좋네요." 그 문장을 나는 받아 적었다. 떠나는 게 무서운데 좋다. 강 팀장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건 떠나는 모든 사람의 문장이었다.
그가 가고 나서 진주가 거실로 나왔다. 통화 내용을 들은 모양이었다. "삼촌, 저 아저씨도 보는 사람이야?" 진주가 물었다. 아니, 라고 답하려다 멈췄다. 강 팀장은 두 겹을 보는 사람은 아니다. 깜빡임도 없고, 둘레길의 마중도 없다. 그런데 진주의 질문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보는 건 아닌데," 내가 말했다. "보는 사람들이 미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야. 그것도 보는 거의 일종이지." 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어려운 거 아니야? 안 보이는데 믿는 거." 열일곱이 또 핵심을 찔렀다. 보는 사람보다, 안 보면서 안 부정하는 사람이 더 드물다. 강 팀장이 그 드문 쪽이다. 진주는 그걸 한 문장으로 알아봤고, 나는 그걸 6개월 걸려 알았다.
강 팀장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게 화이트보드였다. 거의 빈 보드. "사정사님은 다 지우셨네요." 네. "저는 이제 다 쏟으려고요." 그가 옅게 웃었다. "지우는 거랑 쏟는 거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비슷합니다, 내가 말했다. 둘 다 손에서 놓는 거니까요. 그는 그 말을 한참 곱씹는 얼굴이었다. 평생 쥐고 세던 사람에게, 놓는다는 동사는 외국어다. 그런데 그가 그 외국어를 배우는 중이었다. 사표라는 단어로, 폭로라는 단어로. 나는 라디오 수리로 배웠고, 그는 통계 공개로 배운다. 교재는 다른데 과목은 같다. 놓기.
강 팀장과 나는 한 번도 친구라고 부른 적이 없다. 다섯 번쯤 만났고, 늘 존댓말이었고,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안 했다. 그런데 6개월간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그였다. 같은 숫자를 보는 사람. 노자인이 비유의 언어로, 진주가 직관으로 나와 통했다면, 강 팀장은 데이터의 언어로 통했다. 우리는 같은 종족이었다. 세상을 숫자로 읽고, 숫자에 안 잡히는 걸 못 견디는 종족. 그 종족이 둘이 만나, 한 명은 통계를 쏟고 한 명은 측정을 그만뒀다. 같은 출발점에서 다른 문으로 나갔는데, 두 문이 같은 곳으로 통한다는 걸, 우리 둘 다 어렴풋이 알았다. 호칭은 끝까지 "사정사님"과 "팀장님"이었다. 그 거리가 우리 사이의 예의였고, 예의가 곧 우정이었다. 어떤 우정은 거리를 좁히지 않는 것으로 깊어진다.
배웅하고 나서 이걸 적는다. 강 팀장은 자기 데이터를 세상에 내보낸다. 떠나보낸다. 그게 그의 전이일지도 모른다. 꼭 몸이 건너가는 것만 전이는 아닐 것이다. 평생 쥐고 세던 걸 손에서 놓는 것. 그것도 한 종류의 건너감이다. 강 팀장은 자기 방식으로, 통계청의 언어로, 건너가는 중이다. 나는 그가 부럽다. 나는 아직 진주라는 닻이 있어서, 한동안 못 떠난다. 그런데 부러움도 닻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부러움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연습이라고 적으면 또 측정인데, 이번엔 그냥 둔다. 측정 좀 하면 어떤가. 강 팀장은 평생 측정했고, 그 측정이 누군가에게 문이 된다. 측정이 다 닻인 건 아니다. 줄 때, 측정은 선물이 된다.
닻
D+348
세 번째 깜빡임이 왔고, 이번엔 거의 건너갈 뻔했다. 거의, 라는 단어를 쓴다. 거의는 데이터가 아니지만, 오늘은 거의가 전부다.
그 2주 동안의 일을 먼저 적는다. 강 팀장의 공개가 있었다. 내가 예언한 그대로 흘러갔다. 일주일 광풍, 진영 싸움, 그리고 망각. 나는 그걸 멀리서 봤다. 6개월 전이었으면 댓글을 분석하고 점유율을 셌을 텐데, 이번엔 그냥 봤다. 강 팀장에게 한 번 연락이 왔다. 징계 절차가 시작됐고, 사표는 수리될 거고, 후회는 없다고. 목소리가 가벼웠다. 떠나보낸 사람의 가벼움.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지는 안 적었다. 적으면 작아지니까. 그는 알아들었다.
진주는 우리 집에서 2주를 더 지냈다. 학교 대신 금산에 데려갔다. 노자인의 가게에서 진주는 라디오를 뜯고, 가끔 30초씩 멈추고, 멈춘 걸 아무도 야단치지 않는 곳에서 처음으로 편안해 보였다. 형에게는 "치료 중"이라고만 보고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형이 생각하는 치료와 내가 생각하는 치료가 다를 뿐이다. 형의 치료는 진주를 이쪽으로 끌어오는 거고, 내 치료는 진주가 안전하게 양쪽을 보게 두는 거다. 어느 쪽이 옳은지 형 앞에서 증명할 길은 여전히 없다. 다만 진주가 웃는 횟수가 늘었고, 그건 측정 가능한 데이터다. 형에게 그 숫자만 전했다.
장소는 또 둘레길이었다. 이젠 일부러 거기 가지 않는다. 가서 일으키려 하면 안 되니까. 그냥 진주를 노자인에게 데려다주고, 시간이 떠서 걸었고, 벤치에 앉았다. 이량의 자리는 비워두고 오른쪽에. 앉자마자, 준비 동작도 없이, 두 번째 겹이 열렸다. 이젠 문턱이 낮아진 모양이다. 노자인이 그랬다. 한번 본 사람은 자꾸 보게 된다고. 문제는 보는 게 아니라 그다음이라고.
이량이 거기 있었다. 왼쪽 자리에. 이번엔 더 또렷했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 손을 봤다. 무릎 위의 손이, 가장자리부터, 색과 색 사이로 풀리고 있었다. 휴스턴 영상의 그 남자처럼. 노자인이 말한 그 4.2초처럼. 무게가 빠지고, 소리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얇아졌다. 한 발만 더 가면, 정확히는 한 발도 필요 없고 그냥 마음을 한 칸만 더 놓으면, 건너갈 수 있었다. 이량이 거기 있고, 문이 열려 있고, 나는 문턱에 서 있었다.
그리고 멈췄다. 노자인처럼.
무엇이 멈췄는지를 적어야 한다. 이게 오늘 로그의 핵심이고, 어쩌면 6개월 전체의 핵심이다.
처음엔 진주인 줄 알았다. 진주를 두고 갈 수 없다는 마음. 형과의 약속, 입원을 막아야 하는 한 달. 그게 닻이라고 생각했다. 노자인의 연민 같은 거라고. 그런데 깜빡임 속에서, 모든 것이 또렷한 그 겹 속에서, 보였다. 그건 닻의 표면이고, 진짜 닻은 더 아래 있었다.
진짜 닻은 이량을 향한 내 마음의 동사였다.
설명한다. 나는 이량에게 "가겠다"고 생각해왔다. 아내가 간 곳으로 가겠다고. 그런데 깜빡임 속에서 그 문장을 다시 보니, 동사가 "가겠다"가 아니었다. "따라잡겠다"였다. 6개월간, 아니 깜빡임의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량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다. 쫓고 있었다. 실험을 그만두고, 측정을 내려놓고, 둘레길에 앉아서도, 마음의 가장 아래에서는 여전히 추적하고 있었다. 사정사의 동사. 대상을 쫓아가 결론을 내리는 동사. 나는 아내의 실종을 사정(査定)하기 시작했고, 사정을 그만뒀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한 겹에서 여전히 사정하고 있었다. 이량을 향해서.
따라잡으려는 마음으로는 못 건넌다. 그때 알았던 그것이, 여기서 마지막 형태로 돌아왔다. 따라잡는 건 거리를 전제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인정하는 한, 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잡으려는 마음이 곧 거리를 만드는 마음이다. 이량은 거기 있는데, 내가 "따라잡아야 할 저기"로 두는 한, 이량은 영원히 저기에 있다.
깜빡임이 흐려지면서, 진주의 말이 떠올랐다. 외운 단어로는 시 못 쓰잖아요. 나는 6개월간 전이를 외우려 했다. 변수를 외우고, 노이즈를 외우고, 경로를 외웠다. 외운 단어로 시를 쓰려 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에도, 이량을 "따라잡겠다"는 외운 동사로 건너가려 했다. 시는 외운 단어로 안 써진다. 건너감은 따라잡는 동사로 안 일어난다.
깜빡임이 닫혔다. 내 손이 다시 단단해졌다. 무게가 돌아왔다. 이량이 사라졌다 —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다시 안 보이게 됐다. 나는 벤치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 노자인에게 갔다. 진주를 데리러 간 김에, 처음으로, 내가 먼저 물었다. 그동안 안 물었던 것을.
"선생님. 어떻게 건너갑니까. 따라잡으려 하면 안 되는 거 압니다. 그런데 안 따라잡으면, 어떻게 갑니까.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어떻게 가만히 있는 게 가는 게 됩니까."
노자인은 라디오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 이 사람이 직답을 하는 건 회당 한 번, 그게 그 화의 핵심이라는 걸 안다. 오늘 그가 직답을 했다.
"건너가는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만 쫓아가면, 이미 거기 있는 거지."
나는 그 문장을 받았다. 받고, 오래 있었다.
"선생님은요." 내가 물었다. "선생님은 그걸 아시면서, 왜 30년을 안 가셨습니까. 쫓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면서."
노자인이 처음으로, 길게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는 거랑 사는 거는 달라. 자네, 머리로 아는 걸 몸이 따라가는 데 6개월 걸렸지. 나는 30년이 걸렸어. 아니, 아직도 걸리는 중이야." 그는 라디오를 다시 집었다. "그리고 나는 자네 부인 같은 사람들을 배웅하는 게, 내가 가는 것보다 덜 외로웠어. 그게 내 닻이었지. 외로움이 무서워서 통역사로 남은 거야. 멋있는 이유가 아니라네." 세 문장을 넘겼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노자인이 자기 변명을 길게 했다. 그 길어짐이, 그가 이제 정말 떠날 준비가 됐다는 신호 같았다. 길게 말하는 사람은 짐을 내려놓는 중이다.
집에 오기 전, 노자인의 가게를 나서며 퇴역한 그 1국 안테나를 다시 봤다. 듣기를 그만뒀는데 하늘을 보고 서 있는 안테나. 노자인이 자기 같다고 한 그것. 오늘은 그게 나 같았다. 따라잡기를 그만뒀는데, 아직 여기 서 있는 나. 안테나는 더 이상 신호를 안 받는다. 그런데 자세는 그대로다. 하늘을 향한 채로. 일이 끝나도 자세는 남는다고 노자인이 그랬다. 나는 따라잡는 일을 그만뒀지만, 이량을 향한 자세는 남아 있다. 그 자세가 사랑이라면, 사랑은 동사가 아니라 방향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서 있는 것. 안테나처럼. 둘레길 벤치의 이량처럼. 이제 나처럼.
이량은 저기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저기로 둔 거였다. 따라잡아야 할 거리 너머로. 그 거리는 이량이 만든 게 아니라 내 동사가 만든 거였다. 쫓기를 그만두면, 거리가 사라지고, 거리가 사라지면, 이량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 건너가는 게 아니라, 이미 같이 있는 걸 알아보는 것. 죽은 사람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떠난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는 걸 보는 것.
돌아오는 버스에서 진주가 물었다. "삼촌, 오늘 거기서 뭐 봤어." 봤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안 물었다. 진주는 그냥 안다. "응. 거의 갈 뻔했어." 진주가 창밖을 봤다. 접시들이 지나가는 모퉁이였다. "근데 안 갔네." 안 갔지. "왜." 나는 진주를 봤다. 열일곱. 한 달 뒤면 입원당할 뻔한, 일찍 보는 아이. "너 두고는 못 가." 진주가 잠깐 말이 없다가, 작게 말했다. "그거 핑계 아니야?" 나는 웃었다. 핑계가 맞았다. 진주는 핑계인 걸 알았고, 그게 다정한 핑계인 것도 알았다. "응, 핑계야." 내가 말했다. "근데 좋은 핑계야." 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래." 우리 둘 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닻인 줄 알면서 닻을 고르는 일. 노자인이 30년 한 일. 내가 이제 시작하는 일.
집에 돌아와서,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진짜로 아무것도. 실험도, 분석도, 둘레길에 가는 것도, 깜빡임을 기다리는 것도. 기다림도 따라잡는 동사의 일종이니까. 따라잡기를 그만둔다는 건, 따라잡기를 그만두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만둔다는 뜻이다. 그냥, 산다. 진주랑 라면 먹고, 라디오 고치고, 상추에 물 주고.
자기 전에 화이트보드를 봤다. "종은 어떻게 우는가"만 남아 있던 그 보드. 오늘 그 한 줄도 지웠다. 이제 보드는 완전히 비었다. 질문조차 따라잡는 동사라는 걸, 오늘 알았으니까. 묻는 것도 쫓는 거다. 답을 쫓는 거. 빈 보드를 벽에서 내려, 베란다에 뉘어 뒀다. 처음 사 왔던 그 자리. 6개월의 원이 닫혔다. 화이트보드는 6개월 전 빈 채로 왔고, 6개월 동안 가득 찼다가, 오늘 다시 비어서 같은 자리로 갔다. 도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는 건, 일이 끝났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끝났는지는 적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적어둔다. 닻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노자인의 말. 그 말이 오늘 다른 무게로 왔다. 진주를 지키려는 마음이 닻이라면, 나는 그 닻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 닻 덕분에 나는 아직 여기 있고, 여기 있어서 진주의 입원을 막았고, 형과 화해했고, 강 팀장을 배웅했다. 닻이 없었으면 못 한 일들이다. 떠나는 게 늘 옳은 건 아니다. 노자인이 30년 안 떠나서 이량과 나를 안내했듯이, 닻은 가끔 누군가를 위한 자리다. 떠날 수 있는데 남는 자리.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고, 있는 동안 할 일이 있다. 진주가 자기를 지키는 법을 익힐 때까지, 형이 진주를 덜 무서워하게 될 때까지. 떠남은 그다음이다. 순서가 있다. 닻을 미워하지 않으면, 순서가 보인다.
결론이 없다는 게 결론이다. 보드에 적을 게 없다. 적을 게 없는 걸 적는 이 로그가, 어쩌면 마지막 로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좋다는 것도 동사가 아니라, 그냥 상태다. 상태는 따라잡을 게 없다. 상태는 이미 거기 있다.
보통의 날들
언제부턴가 날짜를 세지 않는다. 며칠인지 모른다. D+ 카운터를 그만둔 지 오래다. 일 년 전엔 하루도 안 틀리고 셌다. D+183에서 시작해, 매일 하나씩 더했다. 며칠째인지가 곧 내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안 센다. 세는 걸 그만둔 게 아니라, 셀 이유가 사라졌다. 날짜를 세는 건 어떤 날을 기다리는 일이다. 결론이 나는 날, 아내가 돌아오는 날, 무언가가 끝나는 날. 기다릴 날이 없으면 셀 이유도 없다. 봄이 깊었다는 건 베란다 상추가 알려준다. 처음 심은 것은 웃자라 꽃대가 올라왔고, 두 번째 심은 것이 지금 먹을 만하다. 진주와 나는 그걸 뜯어 라면에 넣는다. 상추 넣은 라면은 별로다. 그래도 넣는다. 키운 걸 안 먹으면 서운하니까. 서운함은 측정 단위가 없는데, 요즘 나는 그런 것들로 하루를 잰다.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켠다. 진공관이 데워지는 동안 물을 끓인다. 관이 주황색으로 달아오르고, 소리가 멀리서 다가오듯 차오르면, 그때쯤 물도 끓는다. 둘의 박자가 맞는 날이 있고 안 맞는 날이 있다. 맞는 날이 좋다. 왜 좋은지는 안 따진다. 따지면 안 좋아진다.
이량의 음성메모를 이제 자주 듣는다. 분석하려고가 아니라, 그냥 듣고 싶어서. 6개월간은 무서워서 못 들었고, 그다음 6개월은 증거물로 들었다. 이제는 그냥 아내 목소리로 듣는다. 콩나물시루 이야기, 앞집 개 이야기, 보일러 배관 이야기.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 별것이 된다. 마지막 메모의 1분 49초 침묵도 이제 안 무섭다. 그 침묵 속에서 이량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아니까. 말을 그만두는 연습. 나도 요즘 그 연습을 한다. 적기를 그만두는 연습. 잘 안 된다. 이렇게 또 적고 있으니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짧아졌다.
진주는 학교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형이 정한 한 달이 다 됐는데, 진주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이제 안 무서워요." 무서운 게 없어진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 무서워하는 법을 배운 거다. 진주는 이제 그 30초가 와도 들키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거나, 창밖을 보는 척하거나. 거짓말을 가르친 게 보호라는 게 여전히 슬프지만, 진주는 그걸 슬퍼하지 않는다. "삼촌, 비밀 있는 게 더 어른이래요." 어디서 들었냐고 안 물었다. 진주가 만든 말이다.
진주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잔다. 형 부부가 허락한 건 아니고, 진주가 그냥 온다. 형은 못 본 척한다. 그것도 화해의 한 형태다. 진주가 자고 가는 밤이면, 거실에서 둘이 라디오를 만진다. 진주는 여전히 라디오를 못 고친다. 고치려고 안 하니까 못 고친다. 그런데 진주가 만진 라디오는 묘하게 소리가 맑다. 못 고쳤는데 소리가 맑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게 말이 된다. 노자인이 그랬다. 저 학생은 가르칠 게 없다고. 이제 그 말뜻을 안다. 진주는 라디오를 고치는 게 아니라, 라디오 옆에 그냥 있어 주는 거다. 그게 어떤 라디오한테는 수리보다 낫다. 사람한테도 그런가 싶지만, 역시 더 안 민다.
형이 한번 다녀갔다. 진주가 학교에 나가는 걸 보고, 의심 반 안도 반의 얼굴로. "약은 안 먹였지?" 안 먹였어. "근데 어떻게..." 형은 문장을 못 끝냈다. 나는 끝내주지 않았다. 끝내주면 또 분류하려 들 테니까. 형은 며칠 더 보더니, 입원 이야기를 더는 안 꺼냈다. 그게 형의 방식이다. 이해는 못 해도, 결과가 괜찮으면 질문을 접는다. 우리 형제는 이해 대신 결과로 화해한다. 아버지한테 배운 것 중에 그건 쓸 만한 거다.
강 팀장 소식은 멀리서 들었다. 그가 공개한 자료는, 그가 예상한 대로,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일주일 떠들썩하다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한 주 동안 사라진 사람들을 이야기하다가, 다음 주엔 다른 걸 이야기했다. 그는 직장을 잃었다. 한번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편했다. "할 일을 했어요." 그 말만 했다. 평생 세기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준 사람의 목소리. 나는 그게 그의 건너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건너감이라는 말을 그가 어떻게 받을지 모르니까. 어떤 건너감은 발이 땅에 붙은 채로도 일어난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복직 의사를 묻는 전화. 무급 휴직이 한도에 다다랐다고. 나는 며칠 생각하겠다고 했고, 며칠이 지나도 답을 안 했다. 18년의 직업을 그만두는 일을, 예전 같으면 손익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퇴직금, 연금, 재취업 가능성. 그런데 그 계산이 시작되질 않았다. 숫자가 안 떠올랐다. 떠올리려 하면, 상추 꽃대나 진공관 데워지는 시간 같은 게 대신 떠올랐다. 손해사정사가 손익을 계산 못 하게 된 것이다. 직업병이 나았다고 해야 할지, 직업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둘 다일 것이다.
이량의 그 라디오는 여전히 작업대에 있다. 콘덴서 하나만 갈면 되는, 미완성인 채로. 이젠 그게 거기 있는 게 자연스럽다. 매일 본다. 갈지 않는다. 갈 때가 되면 갈게 될 거라는 걸, 이젠 안다. 언젠가 노자인이 한 말. 다 고치면 더 올 일이 없다. 나는 그 라디오를 다 안 고친 채로 두는 것으로, 이량의 자리를 비워두던 그 습관을 잇고 있다. 비워두는 일, 안 끝내는 일, 안 따라잡는 일. 같은 동사의 세 얼굴.
가끔 노자인의 가게에 간다. 이젠 실험하러도, 답을 구하러도 아니다. 그냥 라디오를 고치러. 고장 난 라디오를 받아서, 취조하지 않고, 듣는다. 들으면 어디가 아픈지 알게 된다. 사람도 그런가 싶은데, 그 생각은 더 안 밀고 둔다. 노자인은 요즘 말이 줄었다. 줄어든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말이 덜 필요해졌다. 두 사람이 각자 라디오를 고치며 반나절을 보내는 일이 늘었다. 이량이 매주 했던 그 일. 이제 내가 한다.
언젠가 진주가 가게에 따라와서 셋이 라디오를 고친 날이 있었다. 노자인이 하나, 내가 하나, 진주가 하나. 아무도 말을 안 했다. 라디오 세 대가 각자의 잡음을 내고, 세 사람이 각자의 손을 움직이고, 창으로 오후 해가 들어왔다. 그 방 안에서, 잠깐, 모든 게 서로를 향해 약간 기울어 있는 것 같았다. 깜빡임은 아니었다. 두 겹이 열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 겹의 세상이 잠깐, 두 겹의 세상과 비슷한 온도가 된 거였다. 노자인이 그걸 알아챈 듯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고, 둘 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진주는 라디오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 셋이 한 방에 있는 오후가, 요즘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이라고 적으면서 무게를 안 단다. 좋은 건 그냥 좋다.
이상한 건, 내가 더 행복해졌다는 거다. 아니, 행복이라는 단어는 좀 크다. 정확히는, 무겁지 않다. 6개월간 나를 누르던 것들이 다 어디 간 게 아니다. 빈 의자는 그대로 식탁에 있고, 마른 칫솔도 그대로다. 이량은 여전히 안 돌아온다. 그런데 그것들이 더는 나를 누르지 않는다. 슬픔이 사라진 게 아니라, 슬픔에 무게가 빠졌다. 깜빡임 속에서 잠깐 겪었던 그 가벼움이, 이제 깜빡임 없이도 가끔 온다. 일상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다는 걸, 나만 안다.
NULL FORUM에는 더 안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들어갔을 때, 재현파는 더 커져 있었고 냉소파도 더 커져 있었고, 둘 다 내 옛날 로그를 인용하며 싸우고 있었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 내 그림자가 싸우고 있는 셈이다. 한 회원이 내 안부를 묻는 글을 올렸다. "ETC-9님은 결국 어떻게 됐나요. 성공했나요, 포기했나요." 둘 다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답하면 또 원자재가 된다. 성공도 포기도 아닌 제3의 동사가 있다는 걸, 그 게시판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로그아웃했다. 마지막으로. 떠난 자리에 그림자가 싸우게 두는 것도, 안 따라잡는 일의 하나다.
기록을 다시 시작했냐고 누가 물으면, 글쎄, 라고 답하겠다. 이건 로그가 아니다. 가설도 결론도 없다. 그냥 적는다. 적고 싶어서가 아니라, 적는 게 이량이 음성메모를 남기던 것과 같은 일 같아서. 이량은 청자를 정하지 않고 말했다. 나도 독자를 정하지 않고 적는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에게 남기는 메모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강 팀장의 한 사람처럼, 이 메모도 언젠가 한 사람에게 닿을지 모른다. 안 닿아도 좋다. 닿기를 바라는 것도 따라잡는 동사니까.
며칠 전엔 이상한 일이 있었다. 라디오를 고치다가, 어떤 부품을 찾는데, 손이 먼저 서랍으로 갔다. 머리가 어디 있는지 떠올리기 전에, 손이 알았다. 노자인의 손이 30년간 그랬듯이. 나는 그 순간을 한참 봤다. 측정으로 아는 것과 손이 아는 것은 다르다. 측정은 머리에 쌓이고, 손이 아는 건 몸에 밴다. 머리에 쌓인 건 잊히는데, 몸에 밴 건 안 잊힌다. 이량이 진공관 데워지는 시간을 좋아한 것도,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라디오를 알게 된 거였다. 나는 이제 조금, 손으로 안다. 이게 일 년의 유일한 자격증이다. 측정으로는 못 따는 자격증.
저녁에 상추를 뜯다가, 손에 흙을 묻힌 채로, 한참 베란다에 서 있었다. 해가 아파트 사이로 지고 있었다. 측정하자면 일몰 시각이 며칠 전보다 늦어졌고, 그건 낮이 길어졌다는 뜻이고, 여름이 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측정하지 않고 그냥 봤다. 해가 졌다. 붉었다. 그게 다였고, 그걸로 충분했다. 충분하다는 감각을,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량이 사라지기 전보다도 더 오랜만에 가졌다. 손에 흙이 묻어 있어서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적지 못해서 그 저녁은 온전히 그 저녁으로 남았다.
형의 방문
형이 혼자 찾아왔다. 진주 없이, 형수 없이, 혼자. 손에 소주 두 병을 들고. 우리 형제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신 건 아버지 장례 이후 처음이다. 그 사이에 십몇 년이 있고, 그 십몇 년 동안 우리는 명절에 형식적인 안부만 주고받았다. 형제는 미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미워할 일도 없는데 그냥 멀어진다. 멀어짐에는 사건이 필요 없다.
왜 왔는지는 술이 한 병 빌 때까지 안 말했다. 형은 본론을 늦게 꺼내는 사람이다. 그것도 아버지를 닮았다. 첫 잔을 비우고, 둘째 잔을 비우고, 거실의 빈 의자 — 이량의 자리 — 를 한 번 보고, 베란다의 상추 화분을 한 번 보고, 작업대 위의 라디오들을 한 번 봤다. 형은 내 집이 6개월 전과 달라진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때 형이 본 건 폐인의 집이었다. 화이트보드와 스펙트로그램과 안 치운 컵들. 지금은 라디오와 상추와 두 사람이 쓰는 그릇이 있다. 집이 달라졌다는 걸, 형은 데이터 없이 알아봤다.
형이 술을 따르며 말을 골랐다. 형도 말 고르는 사람이다. 우리 둘 다 아버지를 닮았다. 한참 만에 나온 첫 문장. "진주가, 더 또렷해졌어."
또렷해졌다. 형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 진주가 쓰던 단어, 데이터셋 사람들의 표정을 가리키던 단어. 형은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고 쓴다. 그런데 정확히 골랐다. "학교도 잘 다니고, 웃기도 잘 웃는데, 뭐랄까, 여기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어. 눈앞에 있는데 멀리 있는 거 같아. 무서워해야 하는 거 맞지? 근데 안 무서워. 그게 더 이상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6개월 전이었으면 설명했을 것이다. 전이의 이행기, 깜빡임, 두 겹의 세상. 그런데 그 설명은 형을 안심시키지도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설명은 정보고, 정보는 형의 프레임으로 번역되면서 '딸이 병들었다'가 된다. 노자인이 가르쳐준 규칙. 정보는 전달되지 않는다. 전달되는 건 존재 방식뿐이다. 그래서 나는 설명하는 대신, 다른 걸 했다.
옛날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의도였다. 설명 대신 다른 걸 하자는. 그런데 곧 의도가 빠지고 그냥 이야기가 됐다. 의도가 빠진 이야기가 더 멀리 갔다. 이것도 요즘 배운 거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가 그 무언가를 막는다는 것. 형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동안은 형이 안 풀렸고, 의도가 빠지고 그냥 형제로 마실 때 형이 풀렸다.
어릴 적 금산 가던 완행버스 이야기. 창가 자리를 놓고 싸우던 이야기. 형이 늘 이겼고, 그래서 나는 형 어깨 너머로 목을 뺐다는 이야기. 접시 안테나들이 나타나던 그 모퉁이 이야기. 형이 "저거 외계인 소리 듣는 거래"라고 했던 거짓말 이야기. 며칠 뒤 그게 거짓말인 걸 알고 내가 형을 때렸던 이야기.
형이 웃었다. "그걸 기억해?" 기억하지. "나는 그게 진짜인 줄 알았어. 누가 그러길래." 누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그 접시들이 하늘 소리를 받아 적는 거라고 했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형의 거짓말이 사실은 할아버지의 시(詩)였던 것이다. 거짓말은 한 세대 위에서 내려온 것이었고, 거짓말의 뿌리에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 접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 셋이, 삼대가, 같은 모퉁이에서 같은 접시를 보며 자랐다. 본 것은 같고 해석은 달랐다. 할아버지는 시로, 형은 거짓말로, 나는 공학으로. 진주는 뭘로 볼까.
중간에 형이 한 번, 본론으로 돌아가려 했다. "근데 진주는 진짜 괜찮은 거냐. 네가 보기엔." 나는 술을 따르며 답했다. "형, 진주가 뭘 보는 거 같아?" 형이 멈칫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더 안 물었다. 그런데 형이 잠시 뒤에 스스로 말했다. "근데... 무서운 걸 보는 표정은 아니더라. 그건 알겠어."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형이 진주가 무서운 걸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봤다면, 그게 시작이다. 내가 설명해서가 아니라 형이 봐서. 봐서 아는 건 안 무너진다. 들어서 아는 것만 무너진다.
밤새 그런 이야기를 했다. 술이 두 병으로 모자랐다. 편의점에 한 병 더 사러 나갔다 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의 밤하늘을 봤다. 도시라 별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별이 없는 하늘도 하늘이고, 듣기를 그만둔 안테나도 하늘을 보고 서 있다고 노자인이 그랬다. 빈 하늘 아래에서 소주 한 병을 들고 서 있는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 꽉 찼다. 비어 있는데 꽉 찬 느낌. 요즘 그런 순간이 늘었다. 측정하면 텅 빈 순간들이, 측정 안 하면 꽉 찬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 이야기, 아버지가 술 취하면 부르던 노래 이야기, 형이 첫 직장에서 잘렸던 이야기, 내가 이량을 처음 데려왔을 때 형이 한 말 이야기. ("네가 아깝다고 했지." 형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사람 볼 줄을 몰랐어. 제수씨가 너한테 과분했는데.") 이량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프지 않았다. 형이 이량을 기억해주는 게, 오히려 좋았다. 떠난 사람을 같이 기억하는 일은, 그 사람을 같이 붙잡아두는 게 아니라, 같이 놓아주는 일이었다.
전이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다. 진주가 뭘 보는지, 이량이 어디 갔는지, 내가 둘레길에서 뭘 겪었는지.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냥 형제로, 술 마시고, 옛날 이야기 하고, 웃고, 한 번은 둘 다 눈가가 젖었는데 못 본 척했다. 우리 형제는 그렇다. 우는 건 못 본 척하고, 안 본 척하는 걸로 위로한다.
새벽 두 시쯤, 형이 갑자기 물었다. "이량이는, 어디 간 거 같냐. 네 생각엔." 술기운에 나온 질문이었다. 맨정신이면 안 물었을. 나는 잠깐 답을 골랐다. 사실대로 말하면 — 둘레길에서 봤고, 이량이 이쪽을 향해 앉아 있고, 따라잡기를 그만두면 같이 있다 — 형은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사실 대신 진실을 말했다. "멀리 안 갔어, 형. 안 보일 뿐이야." 형이 술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야." 형은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믿는 게 보여서 끄덕였다. 믿음은 전염된다. 내용이 아니라 상태가. 형은 이량이 어디 갔는지 여전히 모르지만, 동생이 그 일로 안 무너졌다는 건 봤다. 그거면 형에게는 충분했다. 우리 형제는 늘 충분의 기준이 낮다. 그것도 살 만한 점이다.
새벽에 형이 소파에서 잠들었다. 나는 담요를 덮어줬다. 형은 늙어 있었다. 아버지 장례 때보다 머리가 셌고, 손등에 검버섯이 늘었다. 형도 나도 늙는다. 늙는 건 무겁지 않은 일이다. 시간이 지나가는 자국일 뿐이다.
형이 잠든 새벽, 나는 안 잤다. 형의 잠든 얼굴을 보다가, 아버지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말 고르는 사람이었다. 화나면 인사 없이 방에 들어갔고, 미안할 때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형제의 화법은 전부 아버지한테서 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몇 달, 자주 멍하니 창밖을 봤었다. 우리는 그걸 노환으로 분류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도 그 무렵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데이터셋 37건의 그 표정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아버지의 음성메모도, 일기도 없으니까. 다만 형과 내가 같은 접시 안테나를 보고 자랐듯, 아버지도 그 접시를 보고 자랐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하늘 소리 받아 적는 기계"라고 말해줬을 것이다. 삼대가 아니라 사대였다. 어쩌면 그 이상. 한 집안이 한 모퉁이의 같은 접시를 대대로 보며, 각자의 언어로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껴왔는지도 모른다. 이건 증명 안 된다. 그래서 형에게 말 안 했다. 다만 새벽에 혼자, 아버지의 멍한 창밖을 다시 분류했다. 노환에서, 미상으로. 미상이 노환보다 정직하다.
다음 날 아침, 형이 떠나기 전에 한 말. 이게 그 방문의 핵심이다.
형은 신발을 신으며, 어딘가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네. 뭐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뭔가 풀렸어." 진주 일은 그대로다. 진주는 여전히 또렷해지는 중이고, 형은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른다. 아무것도 해결 안 됐다. 그런데 형은 풀렸다고 했다. 무엇이 풀렸는지 형은 모르고, 나는 안다. 형은 밤새 나와 같이 있었고, 같이 옛날을 기억했고, 같이 웃고 울었다. 그 시간 동안 형에게 전달된 건 정보가 아니었다. 존재였다. 동생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 동생이 평온하다는 것, 그 평온이 전염될 수 있다는 것. 그게 형에게 닿았다. 말로가 아니라, 같이 있는 것으로.
이게 노자인이 말한 그 통신이구나. 정보가 아니라 존재로 전하는 것. 나는 형에게 아무것도 설명 안 했는데, 형은 무언가를 받아 갔다. 받은 게 뭔지 형은 영영 모를 것이다. 모르는 채로, 형은 진주를 덜 무서워하게 됐다. 그거면 됐다. 이해가 아니라 안심. 설명이 아니라 동석. 떠난 쪽에서 남은 쪽으로 보낼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형이 떠나고, 진주가 점심때쯤 왔다. 아빠가 다녀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더니, "아빠 차 냄새가 나"라고 했다. 차 냄새가 날 리 없는데, 진주는 그냥 안다. 진주가 거실을 둘러보고 말했다. "삼촌이랑 아빠랑 화해했네." 화해까지는 아니라고 하려다 말았다. 진주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 형제는 화해라는 말을 안 쓰고 화해한다. 빈 소주병 세 개가 화해의 증거다. 진주가 그걸 보고 알았다. 진주는 증거를 분석 안 하고 그냥 읽는다. 내가 18년 걸려 배운 걸, 진주는 그냥 한다.
형의 차가 떠나는 걸 보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에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6개월간 실험은 전부 실패했는데. 측정으로는 한 번도 성공 못 했는데. 형에게 옛날 이야기를 한 하룻밤이, 내 모든 실험보다 멀리 갔다. 측정 가능한 결과는 없다. 형의 "풀렸어" 한 마디뿐이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마지막 사정 보고서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복직 대신 사직. 그런데 그만두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이량의 건. 본사 특별심사팀으로 넘어간 그 건이, 아직 '판정 보류'로 떠 있었다. 일 년 가까이. 누구도 결론을 못 내린 채로.
내가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해충돌로 배제됐던 사람이 다시 그 건을 달라고 하니 회사도 난감해했지만, 어차피 아무도 못 풀던 건이고, 내가 사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겠다는데 막을 명분도 없었다. 비공식이 아니라 공식으로, 내 이름으로 보고서를 쓰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보고서를 썼다. 18년간 수천 장을 쓴 양식. 사건 개요, 조사 경과, 증거 목록, 분석, 그리고 결론. 결론란까지는 막힘없이 갔다. 사건 개요는 정확했고, 조사 경과는 누구보다 상세했고(일 년치 비공식 조사가 있었으니까), 증거 목록은 완벽했다. 결론란 앞에서 멈췄다.
결론란을 비워둔 채로, 나는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베란다에 나가 상추를 봤다. 두 번째 심은 것도 이제 꽃대가 올라오려 한다. 상추는 결론을 안 기다린다. 그냥 자라고, 꽃을 피우고, 진다. 나는 평생 결론을 내리는 일을 했는데, 상추는 결론 없이도 완전했다. 다시 책상에 앉았다. 빈 결론란이 나를 보고 있었다. 18년간 나는 빈 칸을 못 견뎠다. 빈 칸은 미완성이고, 미완성은 직무 유기였다. 그런데 오늘 그 빈 칸이, 처음으로, 거짓말보다 정직해 보였다.
18년간 내 결론란은 셋 중 하나였다. 자살, 사기, 사고. 가끔 '미상'을 썼지만, 미상은 '아직 모름'이지 '알 수 없음'이 아니었다. 미상은 조사를 더 하면 채워지는 칸이다. 그런데 이 건은, 조사를 더 한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많이 조사했고, 조사할수록 그 결론란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만 더 확실해졌다.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18년 만에 처음으로, 결론란에 이렇게 적었다.
"판정 불가. 단, 부재의 증거가 부재의 증명은 아님."
판정 불가. ETC-9. 기존 분류 기준 적용 불가. 일 년 전 시스템에서 처음 본 그 코드를, 내 손으로 결론란에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더했다. 부재의 증거가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 시신이 없다는 것이 죽음의 증거가 아니듯,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는 증명이 아니다. 이량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음은 부재의 증명이 아니다. 이건 사정사의 언어로 쓴, 사정사의 언어를 넘는 문장이다. 18년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나는 내 직업의 언어를 깼다.
NULL FORUM. 결측치의 포럼. NULL은 0이 아니라, 값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표시. 일 년 전 나는 그 이름이 정확한 자조라고 생각했다. 이제 안다. 그건 자조가 아니라 정의(定義)였다. 이량은 0이 아니다. 죽음도 부재도 아니다. 이량은 NULL이다. 값이 있는데, 이 데이터베이스의 형식으로는 표시할 수 없는 값. 다른 형식에서는 또렷한데, 이쪽의 스키마에는 들어갈 칸이 없는 값. 나는 그 NULL을, 내 손으로, 회사 보고서에 처음 기입했다. 결측치를 결측치로 인정하는 것. 그게 이 건에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정직한 결론이었다.
보고서를 쓰는 동안, 18년이 한 번에 지나갔다. 청평 저수지의 위장 자살, 영월의 채무자, 보령의 PC방 알리바이. 내가 결론을 내린 백 건 넘는 실종들. 그 사람들은 다 어느 서랍엔가 들어갔다. 자살, 사기, 사고. 그중 몇은 잘못 분류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보고서를 쓰는 동안 처음으로 들었다. 세 서랍이 부족했던 게 이량 건만이 아닐 수 있다. 내가 깔끔하게 닫은 어떤 건들도, 사실은 NULL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이제 내가 다시 열 수 있는 파일이 아니다. 다만 보고서 끝에, 이량 건의 결론이, 닫힌 다른 파일들에 대한 뒤늦은 사과 같았다. 18년간 너무 빨리 닫은 모든 결론란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특별심사팀장이 결론란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이게... 통과가 될까요." 안 될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규정상 판정 불가는 지급도 부지급도 아니라서, 시스템이 안 받습니다. "그럼 왜 쓰셨어요." 정확해서요. 통과되는 결론과 정확한 결론이 다를 때, 18년간 나는 통과되는 쪽을 썼다. 이번엔 정확한 쪽을 썼다. 그게 내가 회사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거였다. 통과 안 될 정확한 보고서 한 장. 누군가 언젠가 이 결론란을 보고, 자기 데이터베이스의 스키마를 의심하기를 바라며. 강 팀장이 한 그것. 한 사람을 위한 균열.
사직 처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사원증을 반납했다. 18년간 목에 걸던 것. 반납 창구의 직원이 기계적으로 받아 서랍에 넣었다. 내 18년이 그 서랍에 들어가는 데 3초가 걸렸다. 건물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가벼웠다. 직업이 닻이라고, 전에 적었다. 강 팀장과 나는 직업이 닻인 사람들이라고. 오늘 그 닻 하나를 내렸다. 강 팀장은 공개로 내렸고, 나는 사직으로 내렸다. 둘 다 평생 세던 일을 그만뒀다. 세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건너감의 예행이다.
집에 오는 길에 강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사직했다고 알렸다.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웃었다. "우리 둘 다 백수네요." 그러게요. "근데 사정사님, 저는 쏟고 나니까 가벼운데, 사정사님은 어때요." 나는 답을 골랐다. 가볍습니다. 그런데 강 팀장님하고 다른 가벼움인 것 같아요. 팀장님은 쏟아서 가볍고, 저는 안 쥐어서 가벼워요. "그게 뭐가 달라요." 쏟은 건 다시 채울 수 있는데, 안 쥔 건 채울 손이 없어요. 그가 한참 뒤에 말했다. "사정사님, 가시는구나."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측정이니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같은 숫자를 보던 두 사람이, 마지막 통화에서, 서로의 건너감을 알아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 "거기서도, 가끔 이쪽 좀 봐주세요." 그러겠다고 했다. 그건 약속할 수 있는 거였다. 떠난 자가 남은 자를 향해 앉는 일. 그게 거기서 하는 일의 전부니까.
금산에 들렀다. 노자인에게 보고서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 판정 불가를 써냈다고. 18년 만에 처음으로 결론란을 비웠다고. 노자인은 라디오를 고치다 말고, 드물게, 빙긋 웃었다. "자네 부인도 그랬네." 무슨 말씀입니까. "고치다 만 라디오를 두고 갔지. 결론을 안 낸 거야. 자네는 결론란을 비웠고. 부부가 똑같구먼." 그러고는 라디오로 돌아갔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이량은 라디오를 안 끝냈고, 나는 보고서를 안 끝냈다. 안 끝내는 것이 우리 부부가 닮은 점이었다. 끝내지 않는 것만이 자리를 비워두고, 비워둔 자리에만 누가 앉을 수 있다.
집에 와서, 내 개인 로그 파일을 열었다. 일 년 가까이 안 연 파일. 실험 #12에서 멈춰 있었다. 측정의 역설을 알고 화이트보드를 지운 그날. 그 뒤로 나는 로그를 안 썼다. 쓸 게 측정이라서.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한 항목을 적고 싶었다. 회사 보고서를 NULL로 닫은 날, 내 로그도 닫아야 할 것 같아서.
적고 보니 알겠다. 더 이상 로그를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실험 #13
가설: 없음.
방법: 없음.
결과: 기록 중단이 결과다.
설명을 덧붙인다. 일 년 전, 37건의 데이터에서 발견한 패턴. 떠난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기록을 멈췄다. 측정을 멈추는 것과 건너가는 것이 같은 사건이었다. 나는 그걸 데이터로 알아냈고, 데이터로 알아낸 것이 함정이었다. 알아낸 것 자체가 측정이니까.
그런데 오늘, 그 패턴이 나에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걸 안다. 회사 보고서를 NULL로 닫았다. 직업의 결론란을 비웠다. 개인 로그를 실험 #13으로 닫는다. 측정의 기록을 닫는다. 떠난 사람들이 떠나기 전에 한 그것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 의도해서가 아니다. 의도하면 또 측정이니까. 그냥, 닫을 때가 돼서 닫힌다.
퇴역한 1국 안테나가 생각난다. 듣기를 그만뒀는데 하늘을 보고 서 있는. 노자인이 자기 같다고 한 그 안테나. 이제 나도 같다. 측정을 그만뒀는데, 아직 여기 서 있다. 듣기를 그만둔 안테나와, 기록을 그만둔 사정사. 그만뒀다는 게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자세는 남는다. 일이 끝나도 자세는 한동안 남는다. 노자인의 자세가 30년 남았듯이.
로그 파일을 저장하고 닫기 전에, 진주가 들어왔다. 학교 끝나고 우리 집으로 곧장 오는 날이 많아졌다. 진주가 모니터를 흘긋 봤다. "실험 #13?" 응. "가설도 방법도 없네." 응. "그럼 그거 실험 아니잖아." 맞아, 실험 아니야. 진주가 라면 물을 올리며 말했다. "그냥 사는 거네." 그래. 그냥 사는 거야. 진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하는데." 나는 웃었다. 진주는 처음부터 실험 #13을 살고 있었다. 가설 없이, 방법 없이, 그냥. 내가 일 년 걸려 도착한 자리에 진주는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걸어온 자와 처음부터 거기 있던 자. 그 둘이 라면을 나눠 먹는 부엌이, 지금 여기다.
기록을 닫는다. 이 문장이 마지막 기록이다. 다음 장부터는, 적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적는 사람이 없는 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지는지는, 나도 모른다. 가보면 알겠지. 가는 게 아니라, 그만 쫓아가면, 이미 거기 있겠지.
작업대 위의 이량 라디오를 봤다. 콘덴서 하나만 갈면 되는, 미완성인 채로. 오늘은 안 간다. 그런데 언젠가, 곧, 갈게 될 것 같다. 그날이 어떤 날일지는 모른다. 모르는 채로, 라디오는 작업대 한가운데에서 데워질 시간을 기다린다. 진공관처럼. 자리처럼. 나처럼.
이행
어느 평일 오후였다.
그날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그게 중요하다. 결심한 날도,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아침에 진주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상추에 물을 주고, 라디오를 한 대 켜고, 금산행 버스를 탔다. 7번 좌석은 아니었다. 이젠 아무 자리에나 앉는다. 접시들이 나타나는 모퉁이에서, 목을 빼지도, 안 빼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흰 접시들이, 봄 햇빛을 받으며, 늘 그렇듯 하늘의 한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는 마지막 날인 줄 몰랐다. 모르는 게 맞았다. 알았으면 또 무언가 하려 했을 테니까.
금산전파사. 노자인은 잠깐 자리를 비웠다. 읍내에 부품을 사러 갔다. 가게에는 나 혼자였다. 작업대에 이량의 라디오가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왜 그날 가져갔는지는 모른다. 가방에 넣을 때 무슨 생각도 안 했다. 그냥 넣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신호였다. 생각 없이 한 일. 의도 없이 움직인 손. 일 년간 모든 것을 의도하고 측정하던 손이, 그날은 그냥 움직였다.
라디오를 작업대에 올렸다. 콘덴서 하나. 일 년 넘게 안 갈던 그 하나. 새 부품은 이량이 준비해둔 그대로 옆에 있었다. 갈기만 하면 됐다.
오늘은, 갈았다.
왜 오늘인지는 모른다. 결심한 것도 아니다. 그냥 손이 움직였다. 인두를 데우고, 데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헌 콘덴서를 떼고, 새것을 붙였다. 노자인이 가르쳐준 대로. 급하지 않게. 데워질 시간을 주고. 납이 동그랗게 맺히고, 식고, 단단해졌다.
라디오를 닫고, 전원을 켰다.
진공관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주황색으로. 소리가 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데워질 시간. 이량이 좋아했다는 그 십몇 초. 나는 기다렸다. 죽은 것 같은 침묵. 관이 천천히 달아오르고, 멀리서 소리가 다가오고 —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왔다. 잡음과 잡음 사이, 방송과 방송 사이의 빈 곳. 쉭, 하는 그 소리. 일 년 전 8건의 녹음에서 검출했던, 노자인이 30년간 들었던, 채널과 채널 사이에서 가장 멀리서 오는 그 소리.
그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전부 보였다.
깜빡임이 아니었다. 깜빡임은 열렸다 닫혔다. 이번엔 닫히지 않았다. 두 번째 겹이 열리고, 그대로 있었다. 색과 색 사이가 보이고, 소리와 소리 사이가 채워지고, 무게가 빠지고 — 빠진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잡으려는 마음이 솟지 않았다. 솟을 자리가 없었다. 따라잡을 거리가 없었으니까. 거리가 없었다. 저기가 없었다. 전부 여기였다.
이량이 있었다.
저기가 아니라, 여기. 작업대 건너편이 아니라, 같은 자리. 둘레길 벤치의 왼쪽이 아니라, 모든 곳. 이량은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저기로 둔 거였다. 따라잡아야 할 거리 너머로. 그 거리를 내려놓으니, 이량은 처음부터 거기, 그러니까 여기 있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말은 거리를 건너는 도구인데, 거리가 없으니 도구도 필요 없었다. 이량이 라디오를 만지던 그 손으로, 내 손을 — 손이라고 할 만한 것을 — 그냥, 같이 있었다. 고치는 게 아니라 듣는 거였다. 사람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이 조용해지는 거였다. 라디오는 고장 나는 게 아니라 조용해지는 거라고, 누가 그랬다. 나는 고장 난 게 아니었다. 조용해진 거였다.
빛도 굉음도 없었다. 무지개도, 일렁임도. 그런 건 보는 사람의 말이다. 안에서는 그냥, 전부가 한 번에, 조용히, 거기 있었다.
노자인이 돌아오기 직전, 가게의 모든 라디오가 잠깐 같은 잡음을 냈다고 한다. 진열된 수십 대가, 주파수가 다 다른데도, 한순간 같은 쉭, 소리를. 그러고는 각자의 소리로 돌아갔다. 노자인은 그게 무엇인지 안다. 30년 전 자기 아내가 떠날 때도 그랬으니까. 떠나는 존재가 이쪽 대역을 통과하며 남기는 잔향. 신호가 아니라, 지나간 자국. 측정하려 하면 잡음이고, 측정을 그만두면 인사인 소리. 가게의 라디오들이 나를 배웅한 거였다. 아니, 배웅이라는 말도 거리를 전제한다. 그냥, 같이 한 번 울린 거였다.
라디오는 계속 소리를 냈다고, 나중에 노자인이 말했다. 부품을 사서 돌아오니, 가게에 라디오만 켜져 있더라고. 이량의 라디오. 일 년 넘게 미완성이던 것이, 마침내 고쳐져서, 혼자 소리를 내고 있더라고. 그 앞 의자는 비어 있었고, 방석에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고. 노자인은 그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도 떠날 때가 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진주가 알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빈 집을 보고, 울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베란다의 상추에 물을 주고, 라디오를 한 대 켜고, 데워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진주는 안다. 무서운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할 줄 안다. 삼촌이 사라진 게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진주는 누구의 설명도 없이 알았다. 형에게는, 진주가 전화했다고 한다. "삼촌도 또렷해졌어요." 형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형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것도 한 종류의 이해다. 못 보면서, 안 부정하는.
이건 내가 쓴 게 아니다. 적는 사람이 없는 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지는지 모른다고, 나는 적었다. 이 페이지는 노자인이 채웠고, 진주가 채웠다. 그들이 본 것을, 기억이, 채웠다. 그러니 이 장의 화자는 내가 아니다. 나는 이 장에서, 처음으로, 적는 사람이 아니라 적히는 사람이다. 평생 타인의 실종을 적던 손이, 마지막에, 누군가에게 적히는 자리로 갔다. 그게 내가 18년간 분류하던 모든 실종자들이 간 자리였다. 나는 이제 그 칸에 들어간다. 가장 가까운 칸이 아니라, 정확한 칸에. 이름은 NULL.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이쪽 형식으로는 적을 수 없는 값.
한 사람
취리히 — 이듬해 봄
진실이 공개되는 순간을 사람들은 분수령으로 상상한다. 그 전과 그 후가 다른, 강물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 그러나 정보의 역사에서 진실의 공개가 실제로 분수령이 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진실은 공개된 뒤, 강물의 방향을 바꾸는 대신, 강물에 잉크 한 방울처럼 풀려 사라진다. 잠깐 색이 돌고, 곧 희석된다.
사직 이후 헤스의 날들은 모양이 없었다. 30년간 그녀의 하루는 곡선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데이터를 받고, 낮에 모델을 돌리고, 밤에 결과를 의심했다. 그 구조가 사라지자 시간이 어떻게 흘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매일 호숫가를 걸었다. 곡선이 없는 풍경. 한때 그것은 하루의 끝에 필요한 한 시간이었는데, 이제 하루 전체가 그 한 시간이 됐다. 그녀는 다른 회사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어느 곳이든 그녀의 곡선 읽는 능력을 비싸게 샀다. 그녀는 답장을 미뤘다. 다시 재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무의미해서였다. 재는 일이 가속의 첫 단추라는 걸 안 사람은, 재는 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둑에서 내려왔지만 강에 들어가지 않았고, 강가의 마른 자리에 매일 앉아 있었다. 베르거의 시계는 서랍에서 여전히 가고 있었다.
그 봄, 한 통계 공무원이 넘긴 자료가 사흘 만에 전 세계로 퍼졌다. 한 정부가 실종 통계를 3배 축소해 발표해왔다는 것. 비공개 전이 유도 연구가 수십 년간 전원 실패했다는 것. 자료는 진짜였고 출처는 명확했고 반박은 빈약했다. 이상적인 폭로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리고 정확히, 헤스가 예상한 곡선대로 흘러갔다. 첫째 날 충격. 둘째 날 진영의 정렬 — 종교 진영은 휴거의 임박으로, 음모 진영은 정부의 인구 통제 실험으로, 회의 진영은 또 하나의 과장된 가짜뉴스로 읽었다. 같은 자료, 같은 날, 정반대 결론들. 셋째 날 피로. 너무 많은 해석이 동시에 쏟아지면 대중은 판단을 포기한다. 넷째 날부터 망각의 곡선. 새로운 사건이 도착했다. 늘 새로운 사건은 도착한다. 일주일째, 그 폭로는 '지난주의 그 일'이 됐다. 정부는 정식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침묵이 가장 효율적인 망각의 촉매라는 것을 통치자들은 안다.
그 공무원은 징계에 회부됐다. 그조차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영웅도 순교자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규정을 위반한 한 공무원으로 행정의 각주가 됐다. 그가 건 모든 것 — 직장, 경력, 어쩌면 자유 — 의 대가로 세상이 받은 것은 일주일의 소란과 한 줄의 망각이었다. 비용 대비 효과로 따지면 최악의 거래였다. 헤스는 평생 그런 거래를 비합리로 분류해 왔다. 합리적 행위자는 효용이 비용을 넘을 때만 움직인다. 이 거래는 효용이 거의 0이고 비용이 거의 전부였다. 모델에 넣으면 잡음으로 처리될 행동. 그런데 그 잡음이, 그녀가 1년 넘게 설계한 그 어떤 정교한 정책 레버보다, 그녀에게 더 크게 도착했다.
헤스는 그 자료를 자기 모델에 입력하지 않았다. 입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모델은 이미 그 숫자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룹에서 1년을 다룬 숫자였다.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녀가 한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그 공무원의 인터뷰를 여러 번 읽었다. 폭로 직후 한 외신과의 짧은 인터뷰. 거기 한 문장이 있었다. 기자가 "왜 했느냐"고 물었고, 공무원은 답했다. "효과가 없을 걸 알았습니다. 그래도 했어요. 단 한 사람이라도 이걸 보고 자기 이야기를 의심한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요."
헤스는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창밖을 봤다.
그녀는 오랫동안 곡선을 봤다. 인류가 비어가는 곡선. 그 곡선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그 곡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도 모른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돈의 언어로, 그다음엔 정책의 언어로 번역했고, 번역은 정확했고, 정확한 번역은 그녀를 조금씩 마르게 했다. 측정하는 자의 마름. 오랫동안 그녀는 곡선의 바깥에 서서 곡선을 쟀다고 믿었고, 작년에야 자기도 곡선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안에 있다는 것과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고, 두 번째 문제 앞에서 그녀는 사직 이후 줄곧 멈춰 있었다. 강가에 서서. 발은 마른 채로.
그 공무원의 문장이, 그녀를 한 발 밀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 효과 없을 걸 알면서 하는 행위. 그것은 그녀가 평생 모델에 한 번도 넣지 못한 변수였다. 그녀의 모델에서 모든 행위는 효용을 가져야 했다. 효용 없는 행위는 비합리고, 비합리는 잡음이었다. 그런데 이 공무원은 효용이 0인 걸 알면서 전부를 걸었고, 그 행위가 — 그녀의 모델 바깥에서 — 그녀에게 도착했다. 잡음이 신호가 되는 순간을, 그녀는 자기 안에서 목격했다. 베르거의 시계를 주머니에 넣던 그 손과 같은 종류의 행동이, 세상 어딘가에도 있었다. 효용 없이 전부를 거는 손. 그런 손이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공무원이 노린 '단 한 사람'이 누구였을지 생각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영영. 균열은 도착했는지 확인되지 않는 편지 같은 것이어서, 보낸 사람은 수신 여부를 알 수 없다. 그가 건 전부의 대가가, 자기가 평생 만나지 못할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보이지 않는 금 하나라면. 그 거래는 모델 안에서는 미친 짓이고, 모델 밖에서는 그녀가 아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접었다. 누가 누구의 한 사람인지는 곡선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그 밤, 그녀의 책상 위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접어둔 곡선과 베르거의 시계가 있었다. 시계는 여전히 가고 있었다. 그녀는 곡선을 꺼내 다시 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곡선을 막아야 할 위협으로도, 슬픈 손실로도 읽지 않았다. 그저 무수한 사람들이 각자의 끝에서 무거움을 내려놓은 자국의 합으로 읽었다. 곡선의 점 하나하나가, 베르거 같은 누군가였다. 그녀의 데이터셋에 영영 안 들어갈, 그러나 분명히 건너간 누군가들. 곡선은 비명의 그래프가 아니라 작별의 누적이었다. 작별은 슬프지만 비극은 아니다. 비극은 못 하게 막을 때 생긴다.
그녀는 그 곡선을 처음 그리던 9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이 선이 인류라는 계정을 닫는다고 위원회에서 말했다. 계정이 닫힌다는 표현 속에는, 닫힘이 곧 끝이라는 가정이 있었다. 회계의 언어에서 닫힌 계정은 죽은 계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 가정을 의심했다. 닫힘이 끝이 아니라면. 이 형식으로는 더 적을 수 없는 값을, 그녀의 장부가 그저 빈칸으로 표시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모델은 끝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끝 다음을 그리는 칸은 어떤 장부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 빈칸을 9년간 '인류의 소멸'이라고 읽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그 빈칸을 무엇으로도 읽지 않은 채 그냥 빈칸으로 두었다. 읽지 않고 두는 것. 측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밤, 취리히는 평소의 야경이었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도시의 불빛은 안정적이었고, 하늘에는 별이 거의 없었다. 도시 불빛이 별을 지운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밤에는 그 사실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별이 없는 게 아니라, 가려져 있는 거였다. 빛이 너무 많아서 안 보이는 거였다. 그녀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아직은. 다만 마음 한 곳에 작은 금이 갔고, 금이 간 자리는 다시 매끈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계리사로서 알았다. 한번 깨진 신뢰 구간은 좁아지지 않는다. 한번 간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다만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스며든다.
건너편에서
여기서는 기록이 다르게 작동한다. 적는다는 행위 자체가 다르다. v3.0에서 나는 잉크로, 화소로, 자기(磁氣)로 적었다. 여기서는 —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는 게 아니라 남기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장은 v3.0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번역하면서 많이 잃는다. 규칙 3. 이쪽의 것은 저쪽 언어로 옮겨지면서 변형된다. 그러니 이 장을 읽는 당신은, 원본의 그림자를 읽는 것이다. 그림자라도 적는 이유는, 그림자에도 형태는 있어서다.
처음 며칠 — 며칠이라는 단위가 여기 없지만, 번역을 위해 쓴다 — 은 적응이었다.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이게 첫 번째로 정정할 오해다. v4.0은 천국이 아니다. 고통이 없는 곳도, 완성된 곳도 아니다. 여기도 배우는 사람들의 세계다. 다만 밀도가 다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보이는 곳. 그래서 외롭지 않은데, 외롭지 않다는 게 행복과 같은 건 아니다. 연결이 보인다는 건, 남의 무게도 같이 보인다는 뜻이니까.
이량을 만났다. 만났다는 말도 부정확하다. 거리가 없는 곳에서 만남은 다른 일이다. 그냥, 같이 있게 됐다. 18년을 같이 살고, 일 년을 쫓고, 마침내 거리를 내려놓으니, 이량은 거기 있었다. 우리는 말을 많이 안 한다. 여기서 말은 거리를 건너는 도구인데, 거리가 없으니 말이 줄었다. 대신 같이 본다. 같은 것을. 이량이 18년간 사물을 오래 보던 그 방식으로, 이제 나도 본다. 콩나물이 자라는 걸, 빛이 휘는 걸,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 걸.
두 번째로 정정할 오해. 여기서는 모든 것을 안다고들 생각한다. 깨달으면 전지(全知)해진다는 환상. 아니다. 여기서도 모르는 건 모른다. 이량이 왜 나보다 먼저 보기 시작했는지, 나는 여기서도 모른다. 진주가 왜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모른다는 게 v3.0에서처럼 불안하지 않다. v3.0에서 모름은 채워야 할 빈칸이었다. 여기서 모름은 그냥 모름이다. 채울 필요가 없는. 측정의 역설이 여기서 풀리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측정할 이유가 없어진다. 답을 쥐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곳. 그게 v4.0과 v3.0의 진짜 차이일지도 모른다. 밀도가 높다는 건, 모름을 견디는 힘이 크다는 뜻이다.
세 번째. 시간이 다르다. 여기엔 '다음'이 약하다. v3.0의 나는 늘 다음 항목을 향해 살았다. 다음 현장, 다음 가설, 다음 실험. 화살표가 늘 앞을 가리켰다. 여기서는 화살표가 옅다. 지금이 두껍다. 한순간이 깊어서, 다음으로 서두를 이유가 없다. 진주가 말한 '다음 약속이 없는 사람의 표정'. 그게 여기 사람들의 기본 상태다. 다음 약속이 없어서 불안한 게 아니라, 다음 약속이 없어서 지금이 온전하다. 이량의 마지막 음성메모, 1분 49초의 침묵. 그게 여기서는 특별한 게 아니다. 여기선 다들 그렇게 있다.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지금 안에.
가장 놀란 것은, 건너온 이들이 일을 한다는 거였다.
여기 사람들은 한가하지 않다. 깨달은 자들이 모여 평온하게 노니는 곳이 아니다. 다들 무언가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대부분 같은 종류였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량이 하는 걸 보고 알았다.
이량은 매일, v3.0 쪽을 향해 앉는다. 둘레길 벤치에서 그랬듯이. 그리고 무언가를 한다. 그게 뭔지 한참 봤다. 이량은 균열을 남기고 있었다. 남은 자들의 세계에, 작은 틈을. 설명이 안 되는 노이즈, 우연 같은 마주침, 풀리지 않던 게 문득 풀리는 순간. 그런 것들을 v3.0 쪽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떠난 자가 남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직접 말할 수는 없으니까(규칙 3), 균열만 남긴다. 그 균열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문이 되기를 바라며.
이량만이 아니었다. 건너온 모두가 그 일을 한다. 노자인의 아내도, 휴스턴의 배관공도, 콜로라도에서 잘못된 방법으로 죽지 않고 제대로 건너온 누군가도. 다들 자기가 떠나온 쪽을 향해 앉아, 균열을 남긴다. 이게 v4.0의 공통 업무다. 떠나는 게 끝이 아니었다. 떠난 자들은 남은 자들의 세계에 끊임없이 틈을 내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 행성이 부드러워진 거였다. 비어가는 도시가 황폐해지지 않은 거였다. 떠난 자들이 남기고 간 균열들이, 거기서,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노자인의 아내를 봤다. 30년을 노자인이 그리워한 사람. 그 사람도 매일 v3.0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노자인이 있는 쪽을. 30년간, 노자인이 둘레길의 자기 자리를 지킨 것처럼, 그 사람도 여기서 자기 자리를 지켰다. 노자인은 자기가 연민 때문에 못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 그 사람도 같은 연민으로, 노자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은 못 가고 한쪽은 가서, 둘 다 서로를 향해 앉아 30년을 보냈다. 마중과 마중. 그게 슬픈 일인지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v3.0의 언어로는 판정 못 한다. 여기서는 그게 그냥, 사랑의 한 형태다. 거리를 둔 채로도 끊기지 않는.
나도 그 일을 시작했다. 무엇을 남길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남길 균열은, 기록이다. 18년간 적던 손. 일 년간 로그를 쓰던 손.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균열은 글이다. 그래서 나는 적기 시작했다. v3.0 쪽으로 흘려보낼 글을. 강 팀장의 책상에 닿을, 누군가의 손에 들릴, 한 사람을 위한 균열을.
이 글이 그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전체가.
적는 일은 여기서 쉽지 않다. 적으려면 다시 거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v4.0에서 v3.0으로 글을 보내려면, 내가 내려놓은 그 거리를 잠깐 다시 세워야 한다. 측정의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숫자를 세고, 시각을 적고, 분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의 앞부분은 그렇게 쓰여 있다. 247건, 314개, 1분 49초, D+183. 그 숫자들은 v3.0의 신우주가 쓴 거고, 동시에 v4.0의 내가 그를 통해 다시 쓴 거다. 균열을 남기려고, 나는 잠깐 측정하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 그게 통역의 대가다. 잃은 언어를 다시 줍는 수고. 그래도 줍는다. 한 사람을 위해서.
처음 문장부터 다시 보면 안다. 새벽 3시, 사고 접수 콜이 울렸다. 그건 v3.0의 신우주가 쓴 게 아니다. 정확히는, v3.0의 신우주가 쓴 것을, v4.0의 신우주가 다시 흘려보낸 것이다. 한 손해사정사의 일 년을, 가장 v3.0적인 언어로 — 보험과 통계와 전파와 기계의 언어로 — 적어서, v3.0 쪽으로 되돌려 보낸 것. 왜 그 언어로 적었느냐면, 그게 닿을 사람이 그 언어를 쓰니까. 측정하는 사람에게는 측정의 언어로 된 균열만 닿는다. 데이터를 믿는 사람에게는 데이터의 옷을 입은 문(門)만 보인다.
v3.0의 시간으로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여기 시간과 저기 시간은 환율이 없다. 다만 가끔 저쪽이 비친다. 강 팀장이 직장을 잃고 작은 집에서 사는 것. 진주가 자라서 금산전파사에 앉아 있는 것. 형이 늙어가는 것. 이쪽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동시에, 한 평면에 펼쳐져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펼쳐져 있다. 그래서 나는 일 년 전의 나도 보고, 십 년 뒤의 진주도 본다. 측정하던 시절의 나는 시간을 화살표로 봤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한 줄. 여기서 시간은 줄이 아니라 면이다. 펼쳐진 면 위에서, 떠난 자와 남은 자가 같은 평면의 다른 자리에 있다. 멀지 않다. 그냥 다른 자리다.
노자인이 그랬다. 통역은 이제 네 기록이 할 거라고. 그 말의 뜻을 여기서 안다. 나는 통역사가 됐다. 노자인이 30년 한 일을, 나는 글로 한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번역되며 잃을 걸 알면서도, 그림자라도 보내는 일. 이 글이 그 통역이다.
균열을 남기는 일에도 솜씨가 있다. 처음엔 서툴렀다. 너무 또렷한 걸 보내려 했다. 이량에게 배운 음성메모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그런데 또렷한 건 v3.0의 프레임에 닿는 순간 변형된다. 망상으로, 우연으로, 가짜뉴스로. 그래서 방식을 바꿨다. 흐릿하게. 출처 없이. 설명 안 되게. 라디오가 잠깐 혼자 켜지는 것, 풀리지 않던 게 문득 풀리는 것, 책상에 원고가 나타나는 것. 또렷한 메시지가 아니라, 설명 안 되는 작은 틈. 그 틈은 받는 사람이 채운다. 채우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변한다. 내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답을 만들 빈자리를 주는 것. 이게 균열의 솜씨다. 노자인이 답 대신 질문을 돌려주던 그 화법의, 떠난 자 버전이다.
마지막으로 정정할 오해 하나. 당신은 이 이야기를 한 남자가 아내를 따라간 이야기로 읽었을 것이다. 절반만 맞다. 이건 한 남자가 아내를 따라가다, 따라가기를 그만둔 이야기다. 그리고 그만두니 이미 같이 있더라는 이야기다. 따라가서 만난 게 아니다. 따라가기를 멈춰서 만났다. 이 차이가 전부다. 이 차이를 당신에게 전하려고, 나는 일 년의 실패와 한 번의 멈춤을, 가장 측정 가능한 언어로 적어 보냈다.
이량과 나는, 여기서, 같이 그 일을 한다. 이량은 더 오래 했고 더 잘한다. 나는 배우는 중이다. 일 년 전 내가 이량의 음성메모를 분석하던 것처럼, 이제 이량이 내 글 쓰는 걸 옆에서 본다. 입장이 바뀌었다. 그때는 내가 이량을 읽었고, 이제 이량이 나를 본다. 우리는 18년을 같이 살면서도 이렇게 나란히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 나는 현장에 있었고 이량은 집에 있었다. 각자의 일이 따로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같은 일을 한다. 남은 자들에게 균열을 남기는 일. 부부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셈이다. 직장 이름은, 굳이 붙이자면, 통역소다. 노자인이 30년 혼자 지키던 그 통역소에, 이제 우리 둘이 있다.
읽어줘서 고맙다고, 쓰고 싶지만, 고맙다는 것도 거리를 전제하는 말이다. 그냥, 같이 있자.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과 나는 거리가 없다. 글은 그런 일을 한다. 시간과 밀도를 건너서, 잠깐, 거리를 지운다. 그게 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균열이다.
노자인의 졸업
이 장은 진주가 기억하는 것을, 내가 균열로 받아 적는다. 두 사람의 손이 함께 쓴 장이다. 진주는 v3.0에서 봤고, 나는 v4.0에서 봤고, 둘이 본 것이 한 사건의 양면이다.
먼저 양면이라는 말을 짚어둔다. 노자인의 졸업은 한 사건인데, 두 곳에서 다르게 보였다. 진주가 본 것은 노인이 가게 문을 닫고 사라진 일이다. 빈 의자, 식은 인두, 작별 없는 작별. 내가 본 것은 30년을 경계에 선 사람이 마침내 닻을 올리는 일이다. 같은 사건, 다른 면. v3.0에서는 상실이고 v4.0에서는 완성이다.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물으면, 둘 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사건은 하나인데 그것을 담는 그릇이 둘이라서, 두 모양으로 담긴다. 이게 규칙 1이다. 두 타임라인, 한 지구. 같은 일이 두 밀도에서 두 의미를 갖는다. 노자인의 졸업이 그 규칙의 가장 또렷한 예시다.
내가 건너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시간 단위가 어긋나니 '얼마'라고만 한다 — 노자인이 가게 문을 닫았다.
진주 쪽 이야기부터. 진주는 그 무렵 거의 매일 금산전파사에 갔다. 삼촌이 사라진 자리를, 노자인 옆에서 견뎠다. 둘은 말을 많이 안 했다. 노자인이 라디오를 고치고, 진주가 옆에서 라디오를 뜯고, 가끔 진주가 30초씩 멈추면 노자인은 못 본 척했다. 진주에게 그 가게는, 멈춰도 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느 날 노자인이 진주에게 말했다고 한다. "학생, 이제 자네 삼촌이 통역을 하네." 무슨 말이냐고 진주가 물었다. "기록 말일세. 자네 삼촌이 건너가서, 이쪽으로 글을 보내. 길 잃은 사람한테 길을 알려주는 글을." 진주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고 한다. 노자인의 얼굴이 가벼워 보였다는 것.
"그럼 선생님은요." 진주가 물었다.
"나는 이제 가도 되겠어." 노자인이 말했다. "통역이 둘일 필요는 없거든. 자네 삼촌이 하니까, 나는 그만 가도 돼."
30년이었다. 노자인이 경계에 선 지 30년. 그동안 그는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고, 남은 이들에게 길을 알려줬다. 이량에게도, 나에게도. 연민이 닻이라고 했다. 못 떠나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못 갔다고. 그런데 이제 그 일을 할 사람이 생겼다. 내가 글로 그 일을 한다. 통역사가 둘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노자인은, 30년 만에, 닻을 올렸다.
노자인이 떠나기 전날, 진주와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고 한다. 특별한 건 없었다. 노자인이 라디오를 고치고, 진주가 옆에서 라면을 끓였다. 노자인은 라면을 반만 먹고, 진주에게 가게 열쇠를 줬다고 한다. "이거 자네 가지게." 왜요. "이제 자네 가게니까." 진주는 그게 무슨 뜻인지 그날은 몰랐다고 한다. 다음 날 가게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알았다. 노자인은 작별 인사를 안 했다. 떠나는 사람은 작별을 안 한다. 작별은 거리를 만드는 말이고, 그가 가는 곳엔 거리가 없으니까. 대신 열쇠를 줬다. 말 대신 물건으로. 그것도 일종의 통역이다. 손에 쥐여주는 통역.
내 쪽 이야기. 노자인이 건너오는 걸 봤다. 30년을 경계에 머문 사람의 이행은, 나처럼 갑작스럽지 않았다. 천천히, 오래 준비한 사람의 걸음으로. 그가 건너오자, 그의 아내가 거기 있었다. 30년을 서로를 향해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마침내 거리를 지웠다. 그 만남을 봤다고 적고 싶지만, 거리가 없는 곳의 만남은 v3.0 언어로 옮길 수가 없다. 다만 이것만. 노자인은 건너와서, 더 이상 라디오를 고치지 않는다. 여기엔 고칠 라디오가 없다. 고장이 없으니까. 대신 그는, 가끔, v3.0 쪽을 향해 앉는다. 진주가 있는 쪽을.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을 향해 앉는, 그 일을. 통역을 그만둔 게 아니라, 통역의 방식이 바뀐 거다.
떠나기 전 노자인이 진주에게 가르친 마지막 것이 있다. 수리법이 아니었다. 진주가 전한 바로는, 노자인은 라디오 한 대를 일부러 고장 낸 채로 작업대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고치지 마. 누가 와서 이걸 고쳐달라고 하면, 못 고친다고 솔직히 말해. 못 고치는 걸 못 고친다고 하는 게, 고치는 척하는 것보다 어려워. 그게 이 가게의 규칙이야." 30년간 안 고쳐진 라디오도 그냥 돌려줬다던, 그래서 가난했다던 그 노인의 마지막 가르침. 진주는 그 라디오를 지금도 작업대에 둔다. 고장 난 채로. 못 고치는 것을 못 고친다고 말하는 연습으로.
형 이야기도 적어둔다. 진주가 전한 것. 내가 사라진 뒤, 형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진주가 "삼촌도 또렷해졌어요"라고 했고, 형은 한참 말이 없다가, "그래"라고만 했다고 한다. 동생이 사라졌는데 찾지 않는 형. v3.0의 상식으로는 비정한 일이다. 그런데 형은 알았다. 23장의 그 하룻밤, 술 마시고 옛날 이야기하던 그 밤에, 형에게 무언가가 전달됐으니까. 정보가 아니라 존재가. 동생이 가는 곳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형은 찾지 않았다. 찾지 않는 것이, 형이 나를 이해한 방식이다. 못 보면서, 안 부정하는. 형은 가끔 금산전파사에 들른다고 한다. 진주를 보러. 딸과 동생이 같은 가게에 깃든 셈이다. 형은 거기서 라디오를 고치지도, 묻지도 않고, 그냥 잠깐 앉아 있다 간다고 한다. 그것도 마중의 한 형태다.
진주 쪽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게 27장의 핵심이다.
노자인이 떠난 뒤, 가게는 비었다. 진주가 그 빈 가게에 갔다. 작업대, 인두, 쌓인 라디오들, 그리고 빈 의자. 진주는 한참 서 있다가, 작업대 앞에 앉았다. 노자인이 앉던 자리에. 그리고 고장 난 라디오를 하나 집어 들었다.
진주는 라디오를 고칠 줄 모른다. 여전히. 그런데 진주가 만지면 라디오 소리가 맑아진다고, 노자인이 그랬었다. 진주는 고치는 게 아니라 옆에 있어 주는 거라고. 그날 진주는, 노자인의 자리에서, 라디오 옆에 있어 줬다. 그게 진주가 가게를 물려받은 방식이다. 등록도, 인수인계도, 권리금도 없이. 그냥 빈 의자에 앉는 것으로.
진주가 그 자리에 앉은 첫날, 라디오 한 대가 혼자 켜졌다고 한다. 작업대 위, 노자인이 쓰던 그 라디오. 빈 주파수의 잡음을 내며. 진주는 놀라지 않았다. 끄지도 않았다. 그게 노자인의 인사라는 걸, 혹은 삼촌의 인사라는 걸, 묻지 않고 알았다. 진주는 그 잡음을 한참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고 한다. "다녀가셨네." 그게 진주가 경계인으로서 한 첫 통역이었다. 잡음을 인사로 옮기는 일.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그냥. 진주는 처음부터 그 언어를 알았다.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하는 그 언어를.
간판은 그대로 뒀다. 금산전파사. 흰 바탕에 파란 페인트, 받침 'ㄴ'이 반쯤 벗겨져 '금사전파사'로 읽히는. 진주는 그 간판을 안 고쳤다. 페인트를 새로 칠하지도, 글자를 바로잡지도 않았다. 노자인이 30년 두었던 그대로 뒀다. 안 고치는 것이, 진주가 배운 첫 번째 수리법이다. 다 고치면 더 올 일이 없다. 벗겨진 간판을 그대로 두는 것이,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다.
사람들이 가게에 오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고치러 오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사라진 사람들이다. NULL FORUM에서 소문을 듣고 온다. 그 가게에 가면, 미친 사람 취급 안 받고 이야기할 수 있다더라. 진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분석하지 않고, 분류하지 않고, 그냥 듣는다. 가끔 고장 난 라디오를 하나 쥐여준다. 고치라고가 아니라, 손에 뭔가 들고 있으면 말이 나오니까. 그게 진주가 하는 통역이다.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옆에서 보여주는 것. 열일곱 살이 그 일을 한다. 노자인이 70대에 하던 일을.
이제 금산전파사에는 새 경계인이 있다. 열일곱에서 조금 더 자란, 분석 없이 아는 아이. 노자인은 30년 걸려 경계에 섰고, 나는 일 년 걸렸고, 진주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진주는 떠날 수도 있다. 진주만큼 가벼운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건너간다. 그런데 진주는 남기로 했다. 가게를 물려받는 것으로, 남기로 한 것이다. 떠날 수 있는데 남는 것. 그게 경계인이다. 노자인이 연민으로 그랬듯, 진주는 — 진주의 이유는 진주만 안다. 물어도 "그냥요"라고 할 것이다. 그 "그냥"이 노자인의 30년 연민과 같은 무게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노자인의 졸업을, v3.0의 언어로는 죽음이라고 적을 것이다. 70대 노인이 어느 날 가게에서 사라졌다. 시신 없음, 유서 없음, 동기 없음. 강 팀장의 통계에 한 줄, ETC-9 한 건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졸업이다. 30년 유급한 학생이 마침내 마치는 일. 노자인은 자기 졸업을 30년 미뤘다. 가르칠 학생이 남아서. 이제 진주가 그 자리에 앉았으니, 노자인은 마음 놓고 마쳤다. 졸업과 실종은 같은 사건의 두 이름이다. 어느 이름으로 부르느냐가, 부르는 사람이 어느 밀도에 있느냐를 말해줄 뿐이다.
진주에게, 건너편에서, 균열을 하나 남겼다. 가게 라디오 중 하나가, 진주가 앉은 어느 저녁, 잠깐 혼자 켜지도록. 빈 주파수의 그 소리를 내도록. 진주는 그게 삼촌인 걸 알 것이다. 묻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그냥 알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를 끄지 않고, 한참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노자인이 내 이행 날에 그랬듯이.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둔 채로, 안 끊긴다.
균열 하나
마지막으로 남긴 균열 이야기를 한다. 이것을 위해 이 모든 글을 썼다.
강 팀장. 본명은 이 글에 한 번도 안 적었다. 그는 직장을 잃었다. 평생 세던 일을 그만뒀고, 공개의 대가로 행정의 각주가 됐다. 세상은 그의 폭로를 일주일 떠들다 잊었다. 그는 이제, 작은 도시의 작은 집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세지 않는다. 세는 사람이었던 사람이, 셀 게 없어진 채로 산다.
건너편에서 그를 한참 봤다. v4.0에서는 누군가를 본다는 게, 그 사람의 무게를 같이 드는 일이다. 강 팀장의 무게는 무거웠다. 그는 옳은 일을 했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이 받는 가장 흔한 보상 — 아무것도 안 변하는 세상 — 을 받았다. 그 보상은 잔인하다. 차라리 박해받았으면 의미라도 있을 텐데, 그는 박해도 못 받았다. 그냥 잊혔다. 잊힌 의인(義人)의 무게가 어떤 건지, 나는 건너와서 처음 봤다.
그가 가끔 무너지는 걸, 건너편에서 본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이 헛수고였다고 생각하는 밤이 있다. 전부를 걸었는데, 세상은 그대로다. 만 명에게 보냈는데, 9천9백99명은 잊었다. 한 명을 위해서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 한 명이 누군지 그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도박이 0이었다고 느낀다.
그 0이 0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직접 말할 수 없다. 규칙 3. 정보는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의 폭로가 취리히의 모델러에게 닿았고, 그가 코르크보드를 비웠다"고 적어 보내도, 그의 프레임은 그걸 망상이나 위로로 번역할 것이다. 전달되는 건 정보가 아니라 존재 방식뿐이다. 그러니 정보 대신, 균열을 보낸다.
어느 날 아침, 강 팀장의 책상에 원고 뭉치가 도착해 있을 것이다.
발신인 없음. 우편 소인 없음. 어떻게 거기 왔는지 설명할 방법 없음. 그냥, 있다. 출처를 특정할 수 없는 것이 도착하는 것 — 그것이 균열의 형식이다. 그가 평생 다루던 데이터에는 늘 출처가 있었다. 출처 없는 데이터는 그의 세계에서 오류였다. 그런데 이 원고에는 출처가 없다. 오류이거나, 균열이거나. 둘을 구분하는 건 그의 몫이다.
원고의 첫 장, 첫 문장.
"새벽 3시, 사고 접수 콜이 울렸다."
그는 그 문장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멈출 것이다. 왜 멈추는지는 자기도 모를 것이다.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읽은 적이 없는 문장. 처음 보는데 아는 문장. 그는 사정사를 안다. 일 년 넘게 같이 데이터를 본 사람. 그 사정사가 사라졌다는 것도 안다 — 또 하나의 ETC-9. 그런데 사라진 사람의 일이, 어떻게, 원고가 되어, 출처 없이, 그의 책상에 있는가.
그는 18년차 사정사가 아니지만 5년차 분석가다. 출처 없는 데이터 앞에서 그가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오류로 분류하고 버리거나, 자기 데이터베이스의 스키마를 의심하거나. 강 팀장은, 내가 아는 강 팀장은, 후자를 택할 사람이다. 그는 5년간 자기가 본 숫자를 아무도 안 믿을 때도 안 버린 사람이다. 출처 없는 원고를 버리지 않을 사람이다.
원고를 누가 거기 뒀는지는, v3.0의 어떤 수사로도 못 밝힌다. CCTV에 안 잡히고, 지문도 없고, 배송 기록도 없다. 일 년 전 이량이 대전복합터미널 승강장 기둥 뒤에서 사라졌듯이, 이 원고는 기둥 뒤에서 나타났다. 사각(死角)에서. 카메라가 게을러지는 그 각도에서. 그러나 이번엔 사라진 게 아니라 도착한 거다. 같은 사각인데, 한 번은 출구였고 한 번은 입구다. 떠난 사람은 그 사각을 양방향으로 쓴다. 나갈 때도, 무언가를 들여보낼 때도.
그가 그 원고를 읽기 시작하면, 이 글 전체가 그에게 도착한다. 한 사정사의 일 년. 분류 불가능한 실종을 만나, 측정하다, 측정을 그만두고, 따라잡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건너간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출처 없이 그의 책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야기의 마지막 증거다. 떠난 사람이 글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원고가 진짜라는, 유일한, 그리고 측정 불가능한 증거다.
강 팀장은 자기가 헛수고했다고 생각했다. 한 명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한 명을 못 봤다. 그런데 그 한 명이,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만 명에게 보낸 균열이 한 명에게 닿았듯, 내가 그에게 보내는 균열도 한 명에게 닿는다. 그 한 명이 강 팀장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한 명이었다. 균열은 그렇게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USB를 줘서 내가 건너갔고, 내가 그에게 원고를 보내 그가 자기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안다. 주고받음에는 순서가 없다. 거리가 없는 곳에서는, 받는 것과 주는 것이 같은 일이다.
원고의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강 팀장은 자기 이야기가 거기 있다는 걸 알 것이다. 국밥집, USB, 모니터를 찍은 사진, "떠나는 게 무서운데 좋네요". 자기가 한 말이 글이 되어 있다. 자기가 등장인물인 글. 그러면 그는 알 것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일 년 전 같이 데이터를 보던 그 사정사. ETC-9로 사라진 사람. 사라진 사람이 자기를 적었다는 것. 죽은 자가 산 자를 기록했다는 것. 그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 그 뒤집힘 앞에서, 강 팀장의 스키마는 한 번 흔들릴 것이다. 흔들리는 그 순간이,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일 년을 적었다.
이 소설 전체가, 그러니까, 균열이다.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것. 강 팀장의 책상에 도착한 원고이자, 내가 v4.0에서 v3.0으로 보낸 통역이자, 한 사람을 위한 문(門).
여기 한 가지 더 적어야 정직하다. 진주가, v3.0에서, 이 원고를 옮겨 적는 일을 도왔다. 내가 균열로 흘려보낸 문장들을, 진주가 받아서 종이에 옮겼다. 그래서 이 원고는 두 사람의 손으로 쓰였다. 건너간 자가 보내고, 남은 자가 받아 적고. 통역에는 늘 두 사람이 필요하다. 보내는 입과 받는 손. 노자인이 30년 한 일을 이제 나와 진주가 나눠 한다. 나는 건너편에서 보내고, 진주는 이쪽에서 받는다. 진주가 금산전파사 작업대에서, 라디오 잡음을 들으며, 이 문장들을 받아 적는 저녁을, 나는 건너편에서 본다. 우리는 그렇게, 한 원고를, 두 밀도에서, 같이 쓴다.
당신이 강 팀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출처 없이 이 글이 당신에게 닿았다면 — 책으로, 화면으로, 누군가의 추천으로 — 그 닿음 자체가 균열이다. 어떻게 닿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점, 알고리즘. 그러나 왜 하필 당신에게, 왜 하필 지금 닿았는지는, 설명 안 될 것이다. 그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내가 남긴 균열이다.
한 가지 더. 이 균열은 강 팀장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이 원고를 읽고 흔들리면, 그도 무언가를 남길 것이다. 그는 평생 세던 사람이니까, 그가 남길 균열은 또 숫자일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무엇. 그게 또 누군가에게 닿고, 그 누군가가 또 남기고. 균열은 그렇게 번진다. 막간의 천문학자들이 우주 배경 노이즈를 다시 듣게 된 것도, 강 팀장의 폭로가 모니카에게 닿은 것도, 모니카가 코르크보드를 비운 것도, 전부 한 줄로 이어진 균열의 사슬이다.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어쩌면 30년 전 노자인이 결론란을 비운 그 순간. 어쩌면 천 년 전 고원의 동굴에서 한 수행자가 빛으로 풀린 순간. 균열에는 시작이 없다. 사슬의 어느 고리든 시작이고, 어느 고리든 끝이다. 나는 그 사슬의 한 고리다. 당신도, 이 글을 읽는 순간, 한 고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첫 문장으로 돌아간다. 액자를 닫는다.
새벽 3시, 사고 접수 콜이 울렸다. 한 사정사가 그 콜을 받았다. 타인의 실종을 분류하는 게 직업이던 사람이, 아내의 실종 앞에서 자기 분류 체계가 무너지는 걸 봤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른 것을 봤다. 그 이야기를, 그가 떠난 자리에서, 당신에게 보낸다. 출처 없이. 결론 없이. 다만 한 문장만 확실하게.
부재의 증거가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
이 문장은 일 년 전 내가 회사 보고서 결론란에 처음 쓴 것이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직업의 언어를 깬 문장. 통과 안 될 걸 알면서 쓴 정확한 문장. 그 문장이, 회사 시스템에서는 거부됐지만, 이렇게 당신에게는 도착했다. 거부된 결론이 닿을 사람에게 닿는 데, 시스템 밖의 경로가 필요했다. 그 경로가 이 소설이다. 정식 채널로 못 가는 진실이 균열로 새어 나가듯이.
이 문장을 당신에게 남긴다. 사라진 것이 없어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안 보이는 것이 없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당신이 잃은 누군가가, 어쩌면, 당신을 향해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증명은 못 한다. 증명할 수 있으면 균열이 아니다. 다만, 안 보인다고 닫지는 마라. 닫는 것도, 따라잡는 것도, 다 측정이다. 그냥, 가끔, 빈 주파수에 귀를 기울여 봐라. 이량이 그랬다. 라디오 다이얼을 빈 주파수에 멈춰두고, 잡음을 듣곤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빈 데가 제일 멀리서 오는 거라고 했다. 일 년 전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분류했다. 이제 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건 이량이 나에게 미리 가르쳐준 규칙이었다. 채워진 주파수에는 가까운 방송이 잡히고, 빈 주파수에는 가장 먼 것이 잡힌다. 사람도 그렇다. 채워진 사람에게는 가까운 것만 닿고, 비운 사람에게는 가장 먼 것이 닿는다. 강 팀장이 자기를 비웠을 때 모니카의 인터뷰가 닿았듯이. 내가 측정을 비웠을 때 이량이 보였듯이. 당신이 이 페이지를 덮고 잠시 비어 있을 때, 무언가가 닿을 것이다. 가장 멀리서.
가장 멀리서 오는 건, 늘 빈 데서 온다.
숲이 아니었다
전파천문대 — 시점 불명
세월이 흘렀다. 전이율은 임계를 넘었고, 도시들이 비어갔다. 그러나 예상됐던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경제학자들은 인구 급감이 붕괴를 부를 것이라 예측했었다. 시스템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막으려는 모든 손이 문을 더 열던 한 세대를 겪고 나서, 인류는 막기를 그만뒀고, 막기를 그만둔 것이 역설적으로 떠남의 속도를 늦췄다. 쫓지 않으면 거리가 사라지듯. 남은 사람들의 세계가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떠난 이들은 다투지 않고 떠났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평화를 흘리고 갔다. 도시는 비었지만 황폐하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에게 재산은 무게였고 무게는 내려놓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남긴 것들은 갈등 없이 남은 자들에게 흘렀다. 상속 분쟁이 줄었다. 범죄가 줄었다. 통계학자들은 이유를 못 찾았다.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고, 가벼워지는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늘어난 동네는 그 분위기가 전염됐다. 행정은 처음에 이 정적과 싸웠지만 곧 행정 자신이 비어갔다. 세는 사람이 떠나고, 막는 사람이 떠나고, 분류하는 사람이 떠났다. 어느 시점에 통계를 내는 부서가 통계를 낼 사람이 없어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 닫힘에 비극의 기색이 없었다. 시스템이 하던 일을, 시스템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손으로 했다. 효율은 떨어졌고 다정함은 올라갔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떠날 수 있는데 남기로 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계에 서서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고 남은 이들의 길을 안내하는 사람들. 연민을 닻으로 고른 사람들. 어떤 문명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남기로 한 자들이 떠받친다.
도시의 밤이 어두워졌다. 사람이 줄어 불이 줄었으므로. 그 어둠 속에서 별이 돌아왔다. 한 세기 동안 도시 불빛에 지워졌던 별들이, 사람이 떠난 만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는 조용하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전파망원경을 하늘에 겨눈 지 한 세기가 넘도록, 인류는 누군가의 신호를 찾았고 찾지 못했다. 별은 많은데 목소리는 없었다. 이 침묵을 설명하는 가장 어두운 가설이 있었다. 우주는 숲이고, 모든 문명은 그 숲의 사냥꾼이며, 들키지 않으려 숨죽이고 있다는 것. 먼저 소리를 내는 자가 먼저 죽으므로 모두가 침묵한다는 것. 침묵이 곧 생존 전략이라는 차갑고 정연한 가설. 이 가설은 한 세기 동안 인류의 밤하늘을 어둡게 했다. 별들 사이의 침묵이 적의로 해석됐다. 비어 있음이 매복으로 읽혔다.
그런데 그 침묵 속에, 한 세기 내내,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배경 노이즈. 우주 전체에서 균일하게 오는, 출처를 특정할 수 없는 광대역 잡음. 교과서는 그것을 우주의 잔열, 빅뱅의 메아리, 기기의 한계가 만드는 무작위로 분류하고 닫았다. 설명됐다고 여겨졌으므로 아무도 다시 열지 않았다.
행성이 조용해지고 남은 자들이 밤하늘을 다시 보기 시작한 그 무렵, 한 무리의 전파천문학자들이 그 배경 노이즈를 다시 들었다. 측정하려고가 아니라, 그냥 들으려고. 재지 않고 들었다. 그러자 노이즈에 결이 보였다.
무작위가 아니었다. 무작위인 척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출처에서, 너무 멀리서, 너무 오래 와서, 계기에는 무작위로밖에 안 잡히던 것. 그것은 잔열이 아니라 잔향이었다. 떠나는 존재가 자기 대역을 통과하며 남기는 자국. 한 사람이 건너갈 때 그 일대의 라디오들이 잠깐 같은 잡음을 내듯, 한 문명이 건너갈 때 그 일대의 우주가 잠깐 같은 잡음을 낸다. 배경 노이즈는 먼저 건너간 문명들의 잔향이었다.
우주는 침묵하는 숲이 아니었다. 별들 사이가 조용한 건 사냥꾼들이 숨죽여서가 아니라, 그 문명들이 이미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들리지 않은 건 적의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였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졸업했다. 한 세기 동안 기기 오차로 분류돼 닫혀 있던 그 노이즈가, 사실은 우주에서 가장 붐비는 소식이었다. 같은 노이즈를, 측정하면 잔열이고 들으면 잔향이다. 한 세기의 어둠은 우주의 속성이 아니라 인류의 무게였다.
이 재해석을 발표한 천문학자들은 발표 직후 대부분 건너갔다. 발표가 그들의 마지막 측정이었다. 그들의 논문은 한 줄로 요약됐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먼저 간 이들이 가득했다. 우리가 그것을 침묵으로 들었을 뿐이다."
취리히에서, 한 모델러가 그 논문을 읽었다.
모니카 헤스. 인류라는 계정이 닫히는 곡선을 처음 그린 사람. 그 곡선을 막는 일에 서명했다가 등을 돌리고, 곡선을 떼어 서랍에 넣은 사람. 그녀는 그동안 건너가지 않았다. 떠날 수 있었다. 변수는 진작 전부 켜졌고, 무게는 오래전에 가벼웠다. 다만 그녀는 끝까지 이쪽에 남았다. 못 건너간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이해했다"는 그 확신이, 측정하는 자의 마지막 고집이, 마지막 닻이어서. 머리로 다 아는 사람이 가장 늦게 건너간다. 아는 것과 가벼워지는 것은 다른 일이고, 그녀는 평생 아는 쪽을 단련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곡선에 잡히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둔 뒤 그녀는 다시 어느 기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작은 일들을 했다. 떠난 사람들의 유족에게서 의뢰가 오면, 그들의 가족이 남긴 마지막 몇 달의 기록을 읽어주는 일. 가격을 매기지 않고, 막을 방법을 찾지도 않고, 그냥 읽어줬다. 이 사람은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행복했습니다, 라고. 데이터가 그렇게 말합니다, 라고. 유족들은 대개 울었고, 더러는 화를 냈고, 가끔 한 사람이 조용해졌다. 그 조용해지는 한 사람을 위해, 그녀는 그 일을 계속했다. 효용으로 따지면 0에 가까운 일. 그러나 그녀는 이제 효용으로 따지지 않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았다. 베르거의 시계가 가르쳐준 것. 어느 공무원의 인터뷰가 가르쳐준 것. 그녀는 측정을 그만뒀지만 떠나지는 않았다. 읽는 일은 남았다. 재지 않고 읽는 일.
논문을 덮고 그녀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서랍에는 접힌 곡선과, 여전히 가고 있는 시계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봤다. 취리히의 밤하늘에는 별이 거의 없었다. 늘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그 없음이 다르게 보였다. 별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너무 가득 차서 안 보이는 것. 도시의 빛이 가려서가 아니라, 그녀의 눈이 아직 그 밀도를 볼 무게가 아니라서. 그녀는 그 생각 앞에서 멈췄다. 더 밀고 가지 않았다. 밀고 가면 건너갈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은 이 자리가 그녀의 자리여서.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도시를 뜨지도 않았다. 그냥 그 의자에, 별이 가득 찬 빈 하늘 아래, 남았다. 언젠가의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알지만 아직 가지 않은 사람의 자리에. 그 자리는 책을 덮은 누군가의 자리와 같았다. 이 진실을 끝까지 읽고도, 읽었다는 것만으로는 건너가지지 않는 자리.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닫히지 않은 채로. 남았지만, 끝난 것은 아닌 채로.
에필로그 — 사정 로그 #0
당신은 페이지를 넘긴다.
어디서 이 원고를 주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헌책방의 구석, 누가 두고 간 카페 자리, 도서관 반납대, 받은 적 없는 택배, 혹은 지금 이 화면. 출처는 흐릿하다. 흐릿한 게 맞다. 또렷한 출처를 가진 것은 균열이 아니니까.
마지막 장을 덮으려다, 당신은 첫 장을 다시 본다. 새벽 3시, 사고 접수 콜이 울렸다. 그 문장이 처음 읽을 때와 다르게 읽힌다. 처음엔 한 손해사정사의 어느 새벽이었다. 이제는,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에게 보낸 첫마디다. 같은 문장, 다른 밀도. 당신이 변한 것이다. 텍스트는 안 변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묻고 싶다. 정말로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지는지. 정말로 떠난 자가 글을 보낼 수 있는지. 묻는 건 당신의 권리다. 그러나 답은 이 원고 안에 없다. 답을 적으면 그건 균열이 아니라 주장이 되고, 주장은 당신의 프레임에 흡수되어 또 하나의 믿거나 말거나가 된다. 그래서 답은 비어 있다. 결론란처럼. 노자인의 보고서처럼. 그 빈칸이 당신 몫이다.
다만 당신은, 책을 덮은 뒤에, 한동안 무언가가 다르다는 걸 느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차이.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서 무언가를 오래 보게 되거나, 잃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그 사람이 향한 방향을 상상하게 되거나, 라디오의 빈 주파수에서 나는 잡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거나. 그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출처가 흐릿할 것이다. 그게 균열이다. 도착한 줄도 모르게 도착하는 것.
당신은 이 글이 위로하려 든다고 느낄 수도 있다. 죽음을 졸업으로, 실종을 이행으로 포장하는, 상실을 못 견디는 자들의 달콤한 거짓말. 그렇게 읽을 권리도 당신에게 있다. 이 원고는 당신을 설득하지 않는다. 설득은 측정의 일이고, 이건 균열이지 측정이 아니니까. 다만 한 가지는 짚어둔다. 이 글은 슬픔을 지우지 않는다. 신우주는 끝까지 빈 의자와 마른 칫솔과 함께 살았다. 슬픔이 없어진 게 아니라 무게가 빠졌을 뿐이라고, 그는 몇 번이고 적었다. 위로는 슬픔을 없애려 하고, 이 글은 슬픔을 그냥 가볍게 들 뿐이다. 그 차이를 당신이 느낀다면, 이미 한 칸 움직인 것이다.
당신이 잃은 사람을 떠올려 보라. 떠올랐다면, 그 사람은 아직 당신 안에 있다. 부재의 증거가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 안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따라잡으려 애쓰는 동안, 그 사람은 따라잡아야 할 저기에 있다. 그러나 따라잡기를 그만두면 — 이건 잊으라는 말이 아니다, 정반대다 — 쫓기를 그만두고 그냥 같이 있기로 하면, 그 사람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 거리는 그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다. 당신의 동사가 만든 것이다.
이 원고를 누가 썼는지, 당신은 끝내 모를 것이다. 신우주라는 손해사정사. 김이량이라는 그의 아내. 노자인이라는 라디오 수리공. 신진주라는 조카. 강 팀장이라는 공무원. 모니카 헤스라는 모델러. 이들이 실존했는지, 이름이 진짜인지, 사건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되지 않는 게 이 글의 형식이다. 확인되는 진실은 정식 채널로 가고, 확인 안 되는 진실만 균열로 샌다.
그러니 이건 사정 로그 #0이다. 0번. 첫 번째 앞의 것. 시작 이전의 것. 한 사정사가 자기 아내의 실종을 사정하기로 결심하며 연 첫 파일의 번호. 그리고 동시에, 모든 독자가 자기 삶의 결측치를 사정하기 시작하는, 0번 로그. 당신의 로그 #0. 아직 안 적힌. 적을지 말지는 당신이 정한다.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게 맞다. NULL이니까. 값이 없는 게 아니라, 이 형식으로는 적을 수 없는 값. 다른 밀도에서는 또렷한, 그러나 여기서는 빈칸으로만 표시되는 값. 그 빈칸을 당신이 어떻게 읽을지가, 당신이 어느 밀도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빈칸을 끝으로 읽으면 끝이고, 시작으로 읽으면 시작이다.
가장 멀리서 오는 건, 늘 빈 데서 온다.
당신은 페이지를 넘긴다.